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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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절반이 잠든 밤,
인생의 절반을 보내는 밤,
그 어둠의 시간동안 벌어지는 도시인의 이야기와 긴 시간동안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에리의 의식을 담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엔 늘 고독함이 떠 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제각기의 외로움을 지니고 있다. 때로는 익숙하게 때로는 미처 익숙해지지 못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세상은 살짝 엇나가 있다. 어딘지 모르게 비정한 혹은 냉정한 냄새가 난다.

이번엔 밤이 찾아와도 잠들지 못하는 인간들의 이야기다. 유일하게 잠든 것은 에리이나 그것은 정상적인 범주의 잠이 아니라 그녀의 일상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비정상적인 잠이다. 그래서 그녀는 의식적으로 깨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해서 그녀가 삶의 끈 자체를 놓아 버린 것은 아니다. 어쩌면 더 단단하게 부여 잡기 위해 잠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전원이 연결되지 않은 텔레비전을 통해 삶을 의식하는데 굳이 전원이 연결되지 않은 것임을 강조하는 것은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보여지는 것이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그녀의 무의식을 투영한 것임을 설명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에리의 모습은 어느때는 텔레비전 바깥에 있기도 하고 어느때는 텔레비전 안에 있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언니인 에리와 비교대상이었던 마리 또한 고독한 존재다. 그녀는 언니의 그림자조차 되지 못한다. 너무 예뻐서 누구에게나 주목받는 에리 덕분에 그녀의 존재는 늘 유리처럼 투명하다. 그녀는 그녀 자체로 의식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끈질기게 자신의 존재감을 포기하지 않는다. 마리가 악착같이 공부했던 이유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녀의 존재는 이미 그녀 자신에게서 조차 분리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이미 언니 에리와 분리된 것처럼 말이다.

마리는 러브호텔 종업원인 고오로기를 통해 언니 에리와 자신의 관계를 환기하는 계기를 얻는다.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게 아닌가 싶어. 그 기억이 현실적으로 중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상관이 없지. 단지 연료일 뿐이야...중요한 기억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기억도, 전혀 쓸모 없는 기억도, 구별할 수도 차별할 수도 없는 그저 연료일 뿐이지."

마리가 언니 에리와 가장 밀접한 유대감을 갖게 되었던 순간이 그녀의 잊혀진 기억 속에서 소환된다.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너무 오랫동안 가려져 왔던 그 날의 기억. 마리는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새벽녁, 에리의 방에 들어가 그녀의 곁에 눕는다. 그리고 그녀를 안는다. 끝내 걷힐 것 같지 않은 어둠도 아침이 되면 서서히 사라지는 것처럼 언니 에리와의 먹먹한 관계도 서서히 개선되길 바라는 희망의 끝을 놓지 않았음을 상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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