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지음 / 첫눈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아무리 바쁘고 팍팍한 일상이라도 주변을 서서히 둘러볼 수 있는 순간은 온다. 길거리에서 잠시 시간이 남아 머무를 때, 지하철과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릴 때, 카페에서 잠시 딴생각을 할 때. 티 나지 않게 사람들의 모습을 살짝씩 들여다본다. 약속시간에 늦은 듯 헐레벌떡 뛰고 있는 사람, 군복을 입고 있는 남자친구를 배웅하는 사람, 전단지를 돌리고 있는 사람, 무거운 배낭과 딱딱한 안경을 쓰고 어딘가로 걸어가는 사람. 모든 사람들의 모습은 평범하지만 자못 특이하게도 보인다. 북적한 도시의 공간 속에서 서로의 긴 숨 ― 일상의 내음 ―이 섞여 알아차리기 힘들 뿐.

모자를 좋아하고, 모자라서 그렇다는 짧은 소개 이외에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필명 모자 작가의 글도 비슷한 모습이다. 뭐든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고 언뜻 보면 매우 평범해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무척 특이하기도 하다 (표지도 그렇다. 그냥 제목만 떡하니 쓰여있는데 거의 파격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편집이라서). 작가는 <숨>이라는 책에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이 품은 이야기를 꺼내 보인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혹은 그녀라고만 불리지만, 이야기는 어찌나 풍부한지. 어떤 사람은 이별을 하고, 어떤 사람은 지나간 추억을 회상하고, 어떤 사람은 시큰거리는 배를 안고 추위 속에서 넘어지고,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기억하며 ‘인연’을 생각한다. 특유의 감성적인 문체 때문에 이들의 모습은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숨’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뚜렷이 나타나있지는 않지만, 다양한 역할과 직업과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점에서 나는 ‘각자의 일상, 혹은 일생’의 은유적 표현일 거라고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읽다 보니 이전에 만났던 ‘양귀자’ 작가의 인물 소설이 떠올랐는데, <숨>의 정보를 보니 에세이 분류에 속해 있다.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너무나 소설 같지만, 에세이 같기도 한 독특한 책. 게다가 잠깐씩 시로 쓰인 이야기도 등장하기도 한다. 그와 그녀, 그들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허구인지 확실히 알 순 없으나, 작가의 눈은 꽤 깊고 따뜻하다는 것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나와는 다른 상황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여느 때보다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가오고 있다. 혹독한 추위, 그리고 삶이 온통 겨울이었던 사람들도 조금이라도 따뜻해지기를


17쪽, <초콜릿 장식>
아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짝을 버린 신발 한 짝이 갈 수 있는 곳은 고작 여기구나. 버려지는 것도 버리고 떠난 것도 결국에는 마찬가지겠구나. 얼룩지고 찢기고 외로워지는구나. 한 켤레의 신발은 헤어진 후에도 서로를 닮았겠구나.

69쪽, <예전에는 경비원이 아니었을>
마음을 지키려고 경비 일을 한다니 말이 안 되지. 상처받는 일을 하면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딱딱해진다는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야. 그런데 내가 경비원이 되고 싶었던가. 하긴, 예전에 다니던 회사도 그냥 다녀야 하니까 다녔지. 그땐 다들 그랬으니까. 그래도 예전에는 사는 게 그럭저럭 재밌을 때도 많았던 것 같은데.

87쪽, <그믐밤, 제페토는 없었다>
유모차에 담긴 어떤 이의 삶은, 그믐에 기대어 종이를 그러모으는 것으로 결말을 맞이해야만 하는가. 그녀는 흩어지는 삶을 대신할 용도로 폐지를 주웠는가. 진정 담고자 했던 세상은 어디로 갔는가. 폐품이 대신 차지해버린 삶의 자리를 언제고 감당해야만 하는 건가. 그녀의 유모차는, 그녀에게 휴식인가 족쇄인가. 생의 끝자락에 다다른 자의 단막은 심오하였고 나는 어느 것도 추측할 수 없었다.

129쪽, <결국 그녀는 네버랜드로 떠났다>
그녀는 쉬는 시간이면 화장실로 달려가 얼굴을 씻었다. 볼이 빨개질 정도로 얼굴을 문지르다가 종이 치고 나서야 교실로 돌아왔다. 친구 몇이 괜찮은지 물어보는 바람에 괜찮아진 줄 알았던 마음이 다시 괜찮지 않아졌다. 아직도 엄마의 이름이 얼굴에 남아서 친구들이 물어보는 걸 테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친구들이 엄마의 이름을 잊어버릴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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