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6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서은혜 옮김 / 민음사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 문학과 그리 친하지는 않지만, 주워들은 것은 많아 '아쿠타가와'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다. 일본 순수 문학을 창작하는 신인들에게 발판을 마련해주는 '아쿠타가와 상'이 바로 작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비참한 현실과 신경쇠약으로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작가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작품 해설을 보면 그가 죽기 전 남겼던 마지막 시구 이야기가 있는데, "자조, 콧물만 코끝에 살아남았네" (304쪽)라는 대목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 이 시구와 『라쇼몬』이라는 책의 전체적인 느낌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것 같았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이란 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수록된 열네 편의 소설들은 짧지만 정곡을 찌르고, 인간사의 비틀린 지점을 정확히 꿰뚫는다. 인간의 본성을 풍자하거나 ('코', '마죽'), 어떤 한 지점에서 몰려오는 불안 ('다네코의 우울', '꿈') 등을 그린다. 선과 악의 경계를 파헤치고 ('라쇼몬), 인생의 중요한 무언가를 제시하는 우화 ('거미줄', '두자춘')를 그리기도 한다. 가히 천재적이라 할만한 점은, 여섯 페이지 남짓한 짧은 단편에서부터 비교적 분량이 많은 단편까지 어느 하나 비슷한 이야기는 없으면서도, 무거운 주제를 희극과 비극,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해 다룬다는 것이다. (이 분위기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나와는 안 맞는 것인데도 중독될 지경이었다.)

 

이는 몇몇 작품에서 절정에 달하면서 절대 잊히지 않을 인상을 남겨주었다. 예술적 욕망과 충돌한 가장 비극적이고 참혹한 장면을 다룬 <지옥변>은 '예술의 이상향'을 꿈꾸었던 그의 실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또한 일본의 상상 속 동물들의 세상을 통해 염세적인 시선을 드러낸 <갓파>에는 그가 가장 궁지에 몰렸을 때에 집필한 것으로, 모든 것을 털어놓은 듯한 자조적인 모습도 엿볼 수 있었다. 일본 고전 영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라쇼몬」 (구로사와 아키라, 1950)의 원작이 되기도 한 <덤불 속>이라는 작품은 새로운 형식과 '중유(中有:이승과 저승 사이, 49재)'를 떠도는 인간의 모습을 새로운 형식으로 다룬 것인데, 생동감 있는 영화로 보고 싶은 마음이 진해지는 작품이다.

 

"아뇨, 너무 우울해서 거꾸로 세상을 바라본 거예요. 그래봤자 마찬가지로군요." (259쪽, 갓파)
현실과 가장 가까운듯하면서도, 또 멀기도 한듯한 세계를 그려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인간의 내면과 부조리한 세계를 다뤄낸 (그리고 재밌기까지 한) 작품들 속에서 그 이름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25쪽, 마죽
물론 그는 그것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 자신조차 그것이, 자신의 평생에 걸친 일관된 욕망이라고는 뚜렷하게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실 바로 그것 때문에 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인간은 간혹 충족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욕망을 위해 일생을 바쳐 버리기도 한다. 그것을 어리석다고 비웃는 자는 필경, 인생에 대한 방관자에 불과할 것이다.

48쪽, 라쇼몬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든 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릴 여유가 없다. 가리고 있다가는 담벼락 아래나 길바닥 위에서 굶어 죽을 뿐이다. 그리고 이 문 위로 실려 와 개처럼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뭐든지 가리지만 않는다면…… 하고 하인의 생각은 몇 번이나 똑같은 길을 오가던 끝에 마침내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않는다면‘이라는 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결국 ‘않는다면‘에 머무를 따름이었다.

89쪽, 엄마
도시코의 목소리에는 지금까지 없었던 격렬한 힘이 담겨 있었다. 사내는 와이셔츠 어깨와 조끼를, 이제는 가득 비치기 시작한 눈부신 햇살로 도금하면서 그 물음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앞을 턱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159쪽, 지옥변
요시히데의 그 얼굴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우마차 쪽으로 달려가려던 그 사내는 불이 타오르는 것과 동시에 발을 멈추고 여전히 손을 내민 채 집어삼킬 듯한 눈초리로 차를 휘감은 화염을 빨려들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온몸에 불빛이 비쳐 주름투성이의 추한 얼굴은 수염 터럭까지 똑똑히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커다랗게 치켜뜬 눈이며, 찡그린 입술 언저리, 혹은 끊임없이 씰룩거리는 뺨 근육 등이 요시히데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오가고 있을 공포와 비통함과 경악을 역력하게 얼굴에 그려놓았습니다. 목이 잘리기 전의 도둑이라도, 아니면 시왕청에 끌려 나간 십억 오악 죄인이라도 그렇게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86쪽, 두자춘
큰 부자가 되면 듣기 좋은 소리를 하다가도 가난해지면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 비하면 얼마나 고마운 마음입니까? 얼마나 애틋한 결심인가요? 두 장춘은 노인이 타일렀던 것도 잊어버리고 엎어질 듯 그 곁으로 달려가더니 두 손으로 빈사 상태인 말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어머니."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