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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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뭔 쓸모가 있어?" 딱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런 식의 말이었다. 가까운 사람에게 듣는 이 말은 살짝 충격이긴 했지만 내가 기분 나빠할까 봐 주저하는 어조가 느껴져서 뭐라 할 수가 없었다. 반박할 타이밍도 없었고, 반박할만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언제든 예상했던 말이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에 대해서 한 말이었다. 나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책을 읽고 수없이 끄적인다. 그렇다고 어떤 상을 받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것을 하는 취미에 불과하다. 이런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왜 하는지 나도 가끔은 답하기 힘들다. 어느 날 갑자기 강렬한 충동으로 찾아온 어떤 목적을 위해 읽게 될지도 모르고, 별것 아닌 이 행위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만, 일단은 자연스럽게 내 생활의 일부가 돼버려 시간에 쫓길지언정 절대로 끊을 수는 없게 되었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그런 식으로 나는 단 한 달 만에 2톤의 책을 압축한다. (10쪽)

 


 고작 몇 년 되지 않은 이 행위를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의 '한탸'와 비교하면 나는 너무나 초라해진다. 삼십오 년 동안 폐지압축공으로 일해온 한탸는 어둡고 답답한 지하실에서 다양한 형태의 폐지를 압축한다. 그러나 매일 트럭에 실려 들어오는 꾸러미 속에는 빛나는 것들이 있다. "꾸러미마다 한복판에 『파우스트』나 『돈 카를로스』 같은 책이 활짝 펼쳐진 채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나뿐이다. (15쪽)" 그는 놀랍게 현존하는 '쓰레기 더미 속의 문학작품'을 정리하느라 쌓여버린 폐지 더미들에 소장에게 핀잔을 들으면서도 멈출 수 없다. 전쟁과 나치 시대, 비밀스럽게 들어온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오직 그뿐이다. 그 아름다운 세계를. 압축기에 눌려 존재를 잃게 될 문학들을 만나는 그의 행위는 너무나 숭고하다.

 


 조용하고 구석진 지하실의 고독을 선택한 한탸에게, 우연히 만난 책의 세상은 시끌벅적하다. 세상이 고독하다는 것을 알게 해준 압축기, 세상이 시끌벅적하지만 달콤하다는 것을 알게 해준 책은 그의 삶 그 자체다. 이 삶이 무너졌을 때의 순간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내용이 짧은 만큼 다른 시각으로 해석할 여지도 충분히 있는 책이지만, 나는 한탸의 삶(어쩌면 작가의 삶이었을)에 진한 연민을 보내며 그의 '러브스토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체코라는 나라와 전쟁 등 끝없는 억압 속에서, 꿋꿋이 체코어로 책을 써온 작가의 삶이 소설로 현현된 것이었을지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주인공의 삶에 매료될 것이다.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 (근원으로의 전진)과 '레그레수스 아드 푸투룸 (미래로의 후퇴)", 행복이라는 불행, 너무 시끄러운 고독! 온갖 모순된 것들을 따져보기에 인생은 무지 짧다. 사라질 것들에 슬퍼하고, 비록 일상은 힘들지라도 소중한 것들에 기뻐하는 순간들이기를.

 

 

 

69쪽,
내가 보는 세상만사는 동시성을 띤 왕복운동으로 활기를 띤다. 일제히 전진하는가 싶다가도 느닷없이 후퇴한다. 대장간 풀무가 그렇고, 붉은색과 녹색 버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내 압축기가 그렇다. 만사는 절룩거리며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데, 그 덕분에 세상은 절름발이 신세를 면하게 된다.

80쪽,
그녀가 치맛자락에 빵 부스러기를 모아 담아 경건한 몸짓으로 불속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불이 모두 꺼진 방안에 누워 천장에 눈길을 고정한 채 빛과 그림자가 춤추듯 일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에 놓인 맥주 단지를 집어들라치면 해초와 수중식물로 가득한 수족관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아니면 보름달 밤에 깊은 숲속에서 흔들리는 그림자들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나는 맥주를 마시며 알몸의 집시 여자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흰자위가 반짝이는 눈으로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88쪽,
폐지 더미 속에서 희귀한 서적의 책등과 표지를 발견하는 그 놀라운 순간이 내게는 언제나 축제나 다름없었는데 말이다. 그 즉시 책을 집어들지는 않았다. 플란넬 헝겊을 집어들고 우선 내 압축기의 굴대를 닦은 뒤 내 힘을 다스리며 종이 더미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그 멋진 책을 펼쳐 들면, 제대 앞에 선 신부新婦의 부케처럼 책이 내 손가락 사이에서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127쪽,
나는 이러고 있는 게 좋다. 저녁 시간에 레트나 대로를 걸어다니는 게 좋다. 공원 냄새, 싱그러운 풀과 나뭇잎 냄새가 강물에 실려와 이제 도로 위에 떠돈다. 나는 ‘부베니체크‘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맥주 한 잔을 시킨 뒤 멍하니 앉아 있다…… 2톤의 책이 잠든 내 머리를 위협하며 호시탐탐 나를 덮치려고 한다. 스스로 걸어놓은 다모클레스의 검이다. 나는 형편없는 성적표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다. 술잔 안의 거품이 도깨비불처럼 표면 위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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