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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개를 베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평점 :

오늘도 변함없이 어제와 같았던 것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어제와 달라진 것들을 생각한다. 시큰한 눈에 안경 대신 렌즈를 끼면서 시야가 맑아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 하는 것. 키보드 커버 속에 먼지가 어떻게 앉았는지 의아해하면서 어떻게 닦을지를 고민하는 것. 책장에 채워진 책을 눈대중으로 세면서 내가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는 날을 상상하는 것. 부드럽고 푹신한 베개를 접어서 목 뒤에 넣어 눕고 오늘 있었던 일과, 먹었던 반찬들과 나눴던 대화들과 감정들을 회상하는 것.
이런 사소한 것들을 소재로 소설을 만들기란 어떨까. 공교롭게도 나는 최근에 평범한 소재로 평범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소설을 두 권 읽었었는데, 윤성희의 『베개를 베다』를 읽고 나서 - 단순 취향일지도 모르지만 - 이야기와 작가의 역량으로 만들어진 한 끗 차이를 경험할 수 있었다.
사실 내게 있던 편견은 소설이란 무엇인가 특별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건 독자의 입장이지만). 이야기든 컨셉이든 문장이든 무엇인가 독특한 연출이 필요한 것이라 여겼다. 그래야 재미가 있고 공감을 사며 독자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윤성희의 소설을 처음 만나는 느낌은 살짝 쇼크였다. 그것은 이 소설이 아주 특이한 것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쉴 새 없이 내뱉는 이 이야기가 오히려 독특함을 자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평범한 일상들을 세밀하고 빽빽하게, 이를테면 엄마와 백숙을 먹으며 했던 말들 ('못생겼다고 말해줘')과 낮술을 먹고 잠에서 깨 창밖에 있는 아이들을 세는 모습들과 ('베개를 베다') 놀러 온 친구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모서리') 것들 같은, 도무지 특별하다고 볼 수 없는 아주 평범한 일상들을 소설은 그린다. 그것이 지루하지 않고 너무도 편안하고 아름답게 읽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지만, 소설의 백미는 또 있다. 담담한 일상 속에 잔금처럼 그어져 있는 상처들이 감춰져 있다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쓸데없는 짓을 하면서 행복해하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거예요." (87쪽, 휴가)
"난 김민수가 괴롭힐 때마다 스머프 엉덩이를 상상했어." (139쪽, 팔 길이만큼의 세계)
"새벽은 어제와 오늘이 겹쳐지는 시간. 그래서 그 시간에 술이 가장 맛있는 거야." (201쪽, 모서리)
어떤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어도 시간이 지나 잊어가며 살아가듯이, 그 순간들이 떠올라도 꾹꾹 참고 견디며 살아가듯이. 그저 남에게는 별일 없이 사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모습들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언니가 쓴 편지보다 형부가 쓴 편지가 더 많아진다든가 (50쪽, 못생겼다고 말해줘) 아빠가 처음부터 도망갈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거나 (166쪽, 낮술), 그것들이 죽음이나 상실, 그 어떤 부정적인 것들을 의미하더라도 소설은 아주 소소한 장면들로 살아갈 힘을 선물한다. 그리고 멋 부리지 않은 문장들 속에서 돋보이는 예쁜 말들이 위로가 된다.
끝으로 너무나 공감이 되었던 해설 속 한 문장을 덧붙인다. 그의 소설을 앞으로도 계속 읽을 것을 약속하면서.
"윤성희의 이야기는 여전히, '소설' '문학' 대신에 '소설적인 것' '문학적인 것'등을 상대할 필요는 없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소설이지 소설적인 것이 아니고 문학이지 문학적인 것이 아니다." (271쪽, 해설 - 최대 소설의 기도)
43쪽, 못생겼다고 말해줘 니가 못생겨서 그래. 언니는 말했다. 니가 더 못생겼어. 내가 말했다. 쌍둥이 자매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못생겼다고 싸우는 걸 형부는 재미있어했다. 그때마다 형부는 늙으면 더 못생겨질 텐데, 하고 놀렸다. 그건 세상의 곱지 않은 시선을 견디는 우리만의 주문이었다. 넌 너무 못생겼어. 넌 너무 못됐어. 넌 너무 뚱뚱해. 그렇게 둘이 서로에게 욕을 하면서 우리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62쪽, 날씨 이야기 남편은 늘 늦었고, 나는 밥을 물에 말아 김치랑 먹었다. 대부분 음식들은 먹기도 전에 유통기한이 지나버렸고 나는 미련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곤 다시 장을 봐서 냉장고를 채웠다. 네번째로 자동차 키를 잃어버린 날, 나는 자동차 바퀴를 걷어차며 화풀이를 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는데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실패를 한 적이 없어서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122쪽, 베개를 베다 나는 장롱을 뒤져 베개를 찾았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굳이 말을 하자면 세제 냄새가 났다. 베갯잇을 벗겨보니 침으로 얼룩진 자국들이 보였다.그제야 내 베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개를 베다. 내가 좋아하는 말이었다. 받아쓰기를 할 때 나는 아들에게 종종 그 문제를 내곤 했다. 아들은 꼭 베게를 베다, 라고 썼다. 나는 거실에 누워 베개를 베다, 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면 잠이 왔다. 마법의 주문처럼.
200쪽, 모서리 내가 찍은 사진과 사촌형의 사진을 번갈아 보던 조가 물었다. 그런데 누구야? 나는 우리 집안에서 가장 똑똑했던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 몇 살인데? 스물일곱. 그러자 조가 우리랑 동갑이야? 하고 물었다. 바보. 흑백사진을 보고도 동갑이란 말이 나오다니. 아니. 스물일곱이었어. 이 사진을 찍었을 때. 그러자 조가 사진을 들고는 가로등 아래로 갔다. 가로등 아래에 서서 조는 사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났다. 그리고 이유 없이 눈물이 나는 내가 창피해서 눈사람을 발로 걷어찼다. 얼었다 녹았다 다시 언 눈사람은 부서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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