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어루만지다
김사인 엮음, 김정욱 사진 / 비(도서출판b)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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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직 모르고 읽는다. 하나의 시에 머무르다가 어떤 감흥이 오지 않으면 다음 시로 넘어가고, 그것을 계속 반복한다. 그러다가 좋은 시를 만난다. 좋은 시라는 느낌은 때로 한 단어에서, 한 문장에서, 문장을 나열한 행간에서 올 때도 있다. 그런 느낌을 받으면 시인이 단어 하나하나 어떤 마음을 가지고 배치했는지 상상해보기도 한다 (줄곧 이 상상은 아주 짧은 순간에 멈춰버리곤 하지만). 이때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시를 어떻게 읽는지 궁금해진다. 나처럼 읽을까. 아니면 좀 더 구체적인 방법으로, 더 세밀하게 따져보며 읽을까.


 그럴 때마다 시에 관한 해석을 엿볼 수 있는 책을 들춰본다. 좋은 시에 좋은 해석까지 볼 수 있는 금상첨화지만, 이런 책들은 글쓴이의 해석에 갇혀 그 너머를 볼 수 없다는 함정도 있다. 김사인 시인의 시 해설집 『시를 어루만지다』는 이 함정이 비교적 큰 편이었다. 페이지 양면에, 왼쪽엔 시, 오른쪽엔 시인의 해설이 정직하게도 딱딱 붙어있다. 시인의 해석이 궁금하지만, 생각을 열어두기 위해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을 꾹 참아야 한다. 이런 함정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끝까지 즐겁게 읽었던 것은, 첫째로 시인의 해석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그가 뽑은 시들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풀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묵화墨畵> 김종삼


 책에는 대개 현대시보다는 그 이전의 시를 담았으며, 이름만 들어도 알 듯한 시인의 시도 어느 정도 배제했음을 밝히고 있다. 시인의 입맛대로 뽑은 시라 모든 이들에게 좋을 리는 만무하지만, 이제 막 시를 알기 시작한 내게는 여태껏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생소한 시인과 시의 향연이 너무도 즐겁게 여겨졌다. 언젠가 꼭 읽어보리라 다짐했던 김종삼 시인의 시가 유독 눈에 띄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그런 시에 붙은 해설은 역시나 주옥같았다. '시를 어루만지다'라는 제목은 시에 대한 김사인 시인의 생각을 어느 정도 내보이고 있는데, 그는 책의 전반부에 '시에게 가는 길'이라는 이름으로 시를 읽는 준비를 함께 다한다.


 이것을 제대로 신기해하는 일, 그 힘의 정체를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일이 시를 만나러 가는 첫 걸음이다.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된 시에 대한 많은 지식들 - 시는 이런 것이다, 또는 저런 것이다 하는 온갖 정의들이며, 정형시, 자유시, 운율, 이미지 등을 동원한 시에 대한 갖가지 분류, 설명, 분석 등 - 이 실은 모두 이 불가사의한 힘에 대한 궁금증의 결과들이다. 그러니 시라는 현상에 닿고자 한다면 선무당 사람 잡는 어설픈 외국이론이나 '유식'에 기대기 전에 이 소박한 물음을 제대로 간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6쪽)


 그는 또한 '매직 아이'를 언급하면서 시 읽기는 "언어들을 2차원의 평면에서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로써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온갖 자유로운 시들이 쏟아져 나오고 시라는 장르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시대에, '시에게 가는 길'이라는 이 책의 도입부가 다소 거창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담은 시와 해설들을 끝까지 읽고 나면 알게 된다. 이 책은 시를 평하거나 어떻게 읽느냐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제목 그대로 시를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시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걸.


 무엇인가 놓치거나 지나쳤다고 두려워하지 말 것. 그대로 즐기되, 2차원의 평면에서만 머무르지 말 것. 책을 읽고 드는 생각이지만 이것은 단연 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문학에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7쪽,
지난 20년 동안 대체로 나는, 시 쓰기는 제 할 말을 위해 말을 잘 ‘사용하는‘ 또는 ‘부리는‘ 데 있지 않다고 말해왔다. 시공부는 말과 마음을 잘 ‘섬기는‘ 데에 있고, 이 삶과 세계를 잘 받들어 치르는 데 있다고 말해왔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과 시의 뿌리가 다르지 않으며, 시의 기술은 곧 사랑의 기술이요 삶의 기술이라고 말해왔다.
생각건대 쓰기뿐 아니라 읽기 역시 다르지 않아, 사랑이 투입되지 않으면 시는 읽힐 수 없다. 마치 전기를 투입하지 않으면 음반을 들을 수 없는 것처럼. 그러므로 단언하자면 시 쓰기와 똑같은 무게로 시 읽기 역시 진검승부인 것이며, 시를 읽으려는 이라면 앞에 놓인 시의 겉이 ‘진부한 서정시‘ 이건 ‘생경한 전위시‘ 이건 다만 사랑의 절실성과 삶의 생생함이란 더 깊은 준거 위에서 일이관지하고자 애쓰는 것이 마땅하다.

37쪽, <墨畵> 김종삼
‘이 하루도‘는, ‘오늘 하루도‘나 ‘오늘도‘와 같지 않다. 모래를 씹듯 꾸역꾸역 나날을 넘기는 이의 쓰디씀과 고독함이 어려 있는 발화, 그 쓰디씀에 대비되어 이어지는 ‘함께 지남‘이 더 눈물겨운 것이다.

117쪽, <참 좋은 저녁이야> 김남호
멀리서 가까이서 죽음의 소식들은 쉼 없이 들려온다. 그 소식들 앞에서의 무력감과 허망함 곁에 이 시를 놓아본다. 정색의 비장과 진지함, 또는 익숙한 탈속의 포즈와 선미가 아니라, 위악과 자조가 섞일망정 비애와 허무를 쉬 내색하지 않으려는 이런 장난기 쪽에 차라리 희망이 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149쪽, <장마통> 박구경
아마도 말들은, 결코 요란하지 않으면서 저를 세심하게, 중하게 대하는 이런 시인을 좋아할 것 같다. 제 할 말이 바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래도 말들이 지닌 표정과 빛깔과 한숨 같은 것을 우선 보고 듣고자 애쓰는, 그런 이를 말들은 더 따르지 않을까. 그런 시인들은 소박해 보이지만 예민하고 적확해서, 무엇에도 양보할 리 없는 언어에 대한 확신과 긍지로 차 있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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