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창비시선 394
송경동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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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선이다. 어떤 방향 전환도 없이 곧게 뻗는다. 이 시집을 읽고 이런 생각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곧게 뻗어 밀고 들어오는 시집은 처음인지, 오랜만인건지 모르겠다. 숨이 막히고 힘이 빠지는, 이 직설적인 시들을 겨우겨우 읽어나갔다.


 그동안 아름다운 시의 문장들을 극찬하던 날들이 떠올랐다. 내 현실은 그리 고통스럽지 않아서 아름다운 것에 자연스럽게 취해 지냈는데, 그 뒤에 이런 시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철거촌, 공장, 망루, 철 구조물에서 쓴 시들이다. 말 그대로 노동과 저항의 시들이다. 부서지고 밟히고 눈물지으면서도, 그것에 짓눌리지 않으려고 쓴 시들이다. 아마도 이것은 현실이다. 내 일상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만약 발견하더라도 금세 내 일이 아니라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외면해버릴.


이제라도

바람에 휙 날려갈 수 있는 가벼운 모자를 하나

찡긋 윙크하며 깔깔깔 웃을 수 있는 즐거운 모자를 하나

한없이 건방져 보이거나 시크해 보이는 모자를 하나

언제라도 표표히 떠날 수 있는 유목민의 모자를 하나 (65쪽, 모자를 쓰고 싶었다)


 이윤과 권력으로 법외에 내몰린 사람들을 위해 이십여 년 동안 거리에서 싸워온 시인은, 올곧은 마음이 속절없이 흔들릴 때가 있다. 파도처럼 끝없이 철썩이고 몰아치는 밤샘 취조실에서 시인은 가장 아프고 서글프다. 사적인 삶이 없다고 말하는 주변인의 말에 뭐라고 답할 기운도 없다. 그런데도 그는 다시 현실로, 거리로 돌아간다. 지금 이 삶이, 짭짤하니 좋다고 한다. '한여름 뙤약볕에서 지하층 바라실'에서 나와 죽지 않기 위해 먹었던 굵고 짭짤한 소금의 맛 ('소금과 나트륨의 차이')을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읽던 '마지막 잎새' ('마지막 잎새')를 생각한다. 그는 아직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한다.


나는 한국인이다 / 아니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 나는 송경동이다 / 아니 나는 송경동이 아니다 / 나는 피룬이며 파비며 폭이며 세론이며 / 파르빈 악타르다 / 수없이 많은 이름이며 / 수없이 많은 무지이며 아픔이며 고통이며 절망이며 / 치욕이며 구경이며 기다림이며 월담이며 / 다시 쓰러짐이며 다시 일어섬이며 / 국경을 넘어선 폭동이며 연대이며 / 투쟁이며 항쟁이다 (102쪽,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그러나 이 희망은 그가 한국인임을 자각할 때, 이따금 무너져내리곤 한다. 캄보디아와 방글라데시, 중국, 베트남 등에서 비겁한 권력을 휘두르는 한국의 거대 자본 앞에서, 그가 했던 투쟁과 항쟁, 그리고 그의 이름과 정체성에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한국인으로서 한국 땅에서 싸웠던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또 다른 땅에서 또 다른 이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이들은 누구인가. 책의 중간쯤에 배치된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라는 시에선 참아왔던 모든 감정이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렇게 치닫기까지의 과정은 지금껏 내가 느껴보지 못한 것이기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11쪽, 고귀한 유산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 내릴 수 있는
생의 정거장은 의외로 많지 않다

21쪽, 시인과 죄수
부디 내가 더 많은 소환장과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의 주인이 되기를
어떤 위대한 시보다
더 넓고 큰 죄 짓기를 마다하지 않기를

60쪽, 국가, 결격사유서
그런데도 낡지 않는 것은 약속이다 /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살겠다는 약속 / 거기, 우리 모두 부조를 놓고 / 갈비탕 한그릇씩 비우고 왔다는 약속 / 언제 오느냐는 전화 어디냐는 전화 / 아이는 찾았느냐는 전화 그랬다는 전화 / 들어온다 한 지가 언제냐는 전화 / 말없이 종료 버튼을 누르는 전화

82쪽, 법외 인간들을 찬양함
희한한 세상, 모두 기를 쓰고
법 내로 들어가겠다는데
국가가 나서서 모두를 법외에서 살라 한다

150쪽, 아직은 말을 할 수 있는 나에게
말 없는 당신에게가 아니라 / 아직은 말을 할 수 있는 나에게 / 모든 생을 우리에게 주고 가버린 당신에게가 아니라 / 아직은 살날이 많은 저 아이들에게 / 우리는 무어라고 얘기해야 하나 / 샌들과 지갑을 머리맡에 놓고 / 무슨 좋은 꿈을 꾸는지 / 잊을 만하면 키득키득 웃으며 잠꼬대를 하는 / 아이 방을 몇번이나 드나들며 / 세월이 흘러도 양철북처럼 키가 자라지 않는 당신께 / 참 쓸 수 없는 시 한편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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