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성 시인선 : 슬픔에게 언어를 주자 아티초크 빈티지 시선 13
나혜석.에밀리 디킨슨 외 지음, 공진호 엮고옮김 / 아티초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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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제목은 셰익스피어 『맥베스』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첫 장부터 큰 활자로 쓰여있다. "슬픔에게 언어를 주오. 말하지 않는 큰 슬픔은 무거운 가슴에게 무너지라고 속삭인다오." 세계 여성 시인들의 시를 모아놓은 이 책 속의 누구도 "슬픔에게 언어를 주오"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잘 맞아떨어지는 제목이 있을까. 슬픔에겐 언어가 특효약인 것을, 슬픔을 부르짖지 못하면 더 지독한 슬픔으로 침잠해져 가는 것을. 이들은 그렇게 슬픔을 언어로 외쳤다. 고통과 괴로움, 자유와 긍지, 때로는 사랑과 배신을 시詩로 적었다.


 또한, 그동안 '한국 시' 뒤켠에 있었던 국내 여성 시인들의 시가 많이 실려 있다는 것이 특히 눈여겨본 점이었다. 내가 한국의 시와 소설을 끊임없이 읽는 이유, 그리고 한국의 근현대 여성 시인들의 시를 보고 쉽사리 책장을 넘기지 못했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한恨 때문이다. 슬픔이 담긴 언어가 건드리는 특별한 지점이 있다. 이 책에 등장한 시인 '김명순'의 시는 유독 그러하다.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永訣)할 때

개천가에 고꾸라졌던지 들에 피 뽑았던지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다오.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그러면 서로 미워하는 우리는 영영 작별된다.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 <유언> 김명순


 '탄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근대 최초의 여성 작가 '김명순'의 시를 읊으면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의 삶을 알고 나면 더욱 애처롭다. 기생의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나쁜 피'라는 이름이 따라다녔고, 성폭력을 당해도 그가 방종한 탓이라고 했다. 당시 놀라운 수준이었던 그의 문학보다는 사생활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함께 글을 쓰던 당대 문인들 또한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한국 문학계에서 떠밀린 그는 죽음조차도 외로웠다. 오죽하면 이렇게 외쳤을까.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으며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김명순의 시를 포함한, 『슬픔에게 언어를 주자』 속의 모든 시는 각기 다른 측면으로 가슴을 울렸고, 오래된 역사와 통념에 가려 남성들과 동등하게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시인들의 글이라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회와 통념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뒤로 밀려나 있었던 이들의 시를 모아 여성들의 연대를 희망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고 느껴졌다. 라틴 아메리카의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미스트랄'이 했던, "저 여자의 내면에 있는 불은 어떤 것이기에 그녀는 그슬리지도, 연소되지도 않는 걸까?" ('예술' 130쪽) 라는 말처럼, 여성 시인들의 마음속에서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불빛은 뜨겁고 무엇보다 환하게 (언어로) 피어오른 것 같았다. 이들 각자의 시를 더욱 찾아볼 예정이다. 누구보다도 강하게 빛났던 내면의 불씨들이, 누군가가 읽어줌으로써 다시 활활 피어오르기를 고대한다.


 

 

 

73쪽 <녹음> 백국희
소녀의 부끄러움은 오직 붉고 / 그 시절의 꿈만이 가물거린다 //
뻗어가는 찰나는 / 한 점으로 과거와 미래를 이어 . . . //
연홍의 로맨티시즘을 / 초록빛의 현실이 앗았고나


79쪽 <사포의 노래> 크리스티나 로제티
새벽에 한숨짓고, 또 한숨짓네,
찌푸린 하루가 지나갈 때.
저녁에 한숨짓고, 또
한숨짓네, 밤이 잠을 부를 때.
아, 이렇게 슬퍼하고 한숨짓느니, 나 죽어
꿈 없는 죽음의 잠을 자며 날 위해
우는 사람이 없음을 모르는 편이 훨씬 나으리.

110쪽, <‘강이 붉다‘ 곡에 맞춰> 치우 찐
우리는 버릴 것이다,
보석으로 장식된 옷과 기형의 발을.
그리고 언젠가, 하늘 아래 모든 이는
꽃밭의 꽃처럼 피어나는,
훌륭하고 고귀한 아이를 낳는,
아름답고 자유로운 여성을 볼 것이다.

147쪽, <이혼 고백장 - 청구 씨에게> 나혜석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운명이 어찌될지 모릅니다. 속 마디를 지은 운명이 있습니다. 끊을 수 없는 운명의 철쇄이외다. 그러나 너무 비참한 운명은 왕왕 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반역케 합니다. 나는 거의 재기할 기분이 없을 만치 때리고 욕하고 저주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필경은 같은 운명의 줄에 얽히어 없어질지라도 필사의 쟁투에 끌리고 애태우고 괴로워하면서 재기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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