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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기완을 만났다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엔 그냥 문장 한 줄이었다. 한 시사 주간지에 L이 고백했다고 쓰인. 그것이 그녀를 브뤼쎌로 이끌었다.
"브뤼쎌에 갈지도 모르겠어요. (…) 거기, 만나야 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요.(13쪽)." 확고한 결심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 간다는 어투도 아닌, 어딘지 모르게 애매한 말로 그녀는 말했다. 그리곤 단지 마음속에서만 '그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결심했다.
이니셜 L, 무국적자, 난민, 불법체류자, 탈북자, 이방인 혹은 외톨이…… 그것이 '로기완'이라는 사내에게 붙은 이름들이었다. 생존을 위해 북한 국경을 넘고, 어머니까지 잃어 그 목숨값을 들고 벨기에라는 생소한 나라에 밀입국했다. 자신의 존재도, 길거리의 풍경들도 확연히 다른 그곳을 거닐었다. 떠돌고 떠돌다가 어디론가 흘러갔다.
정체 모를 연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자에겐 과하도록 진한 감정이었다. 그녀에게 특히나 연민이란 별것 아닌 감정이었기에 이상했다. 그녀는 형편이 안 좋거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찍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고통을 글로 전달하는 프로그램의 메인 작가였고, 연민은 습관처럼 흘러가는 감정이었다. 그런 그녀가, 로기완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프로그램에서 만나 남다른 인연을 맺은 '윤주'라는 소녀를 생각하며, 옛 연인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로기완의 흔적을 밟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또 하나의 외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면서. 그녀는 어느새 L이 걷던 그 길을 걷고 있었다. 그 길을 걸으면서 L을 기억했다. 브뤼쎌에 와서 첫 끼를 먹던, 자신이 살고 있던 곳과는 확연히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 시선들을 보던, 몸살을 앓고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에게 저항하던, 울음 짓던, 처음으로 미소를 보이던 L을. 그를 의식하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타인의 인생 반경은 똑같을 수가 없기에, 그를 이해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힘내"라는 말은 때로는 공감한다는 말보다 '너의 말을 잘 들었지만 해줄 말이 없어 미안해'라는 의미로도 쓰이기도 한다. 아파하는 타인의 모든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진짜 마음을 알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니 쉽사리 연민하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의 인생으로 들어가 어떻게든 그를 이해하고 연민하고자 하는 노력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은 『로기완을 만났다』 라는 이야기처럼 누군가의 인생을 추적하는 일일지도, 누군가가 남긴 일을 이어가는 일일지도, 아니면 그냥 깊은 대화를 하거나,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모습으로도 이야기될 수 있다. 위태롭고 유약하며 비틀거리는 『로기완을 만났다』 속의 사람들을 보고 연민을 느끼고, 어느새 주인공이 로기완을 보고 느꼈던 감정을 따라 하고 있는 내 모습도 아마도 그런 일의 연장선이 아닐까. 타인의 생生을 파고들기로 결심하는 것과 수많은 삶을 담은 문학을 읽는 것은 그 성격이 닮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한 정을 품고 있기에 나는 여전히 책을 읽는다.
13쪽,
고개를 들었다. 내 시선은 그의 피로하고 괴로운 듯한 얼굴을 벗어나 조금은 어두침침한 편집실 전체로 나아갔고, 이내 그 안에 깃들어 있던 우리의 친밀했던 숨소리와 목소리까지 담아냈다. 순간, 모든 것을 화면처럼 남게 하는 인간의 기억 구조가 싫어졌다. 그래서 잊고 싶지 않은 것도 잊고 싶은 것과 함께 드러날 수밖에 없는, 볼륨을 줄여놓아도 고스란히 소리까지 재생되고 마는 그 체계적인 기억의 구조가.
57쪽,
박이 빌려준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슈트케이스를 현관 앞에 세워두고는 그대로 거실 창가에 놓인 책상 앞에 앉는다. 가방에서 로의 일기를 꺼내 이번만큼은 행간의 의미,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여백까지 꿰뚫는 독서를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섣불리 연민하지 않기 위하여, 텍스트 외부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내부로 스며들어가 스스로에 대한 가혹한 고통과 뒤섞인 진짜 연민이란 감정을 느껴보기 위해서.
91쪽,
로는 조금 걷다가 멈춰섰고 다시 걷다가 주저앉았다. 수없이 불운을 짐작해온 자의 어깨는 끊임없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러나 그 슬픔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던 가상의 슬픔이었기에 마음의 밑바닥까지 닿지는 않았었다. 그 짐작이 현실이 되었을 때 좌절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뒷모습은 어느새 구체적인 슬픔으로 바뀌어 내 가슴에 얹어진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로가 다급하게 어디론가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다.
113쪽,
파이프오르간 연주가 끝날 때까지 상상 속 로의 눈물은 닿을 듯 닿지 않는다. 너와 내가 타인인 이상 현재의 사간과 느낌을 오해와 오차 없이 나눠가질 수는 없다는 불변의 진리는 자주 나를 괴롭혔지만 가끔은 위안도 되었다. 나의 한계에 대해서 적어도 나만은 침묵할 자격이 있다는 믿음은 그러나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3년 전, 내가 앉아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어깨를 잔뜩 옹송그린 모습으로 온몸을 떨며 오열했을 로의 모습을 상상의 영역에 남겨둔 채, 나는 끝내 젖지 않은 내 메마른 얼굴을 한 손으로 거칠게 쓸어내린다.
166쪽,
존재 자체가 불법인 사람에게 미래는 선택할 수 있는 패가 아니다.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선택되어버린 길을 가야 한다는 단순한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 매순간 불안해하면서, 사소한 기쁨은 포기하기도 하면서, 절대적으로 안전하지는 않으나 절대적으로 위험한 길보다는 무언가 하나라도 더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을 가고, 걷고, 결국엔 살아남아야 한다는 빈약하지만 회피할 수 없는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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