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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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82년생 김지영도 아닌, 그보다 더 나은(게 맞는지 줄곧 의심하지만) 시대에 태어난 '여자'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넘어갔던 일들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일들을 회상했다.


 ​우리 엄마는 기가 막히는 시집살이를 했다.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고 했다. 이 기가 막힌 시집살이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분가를 하고, 늦둥이 아들을 낳자 놀랍게도 완화되었다. 가부장적인 제도에 익숙했던 우리 가족의 남자들은 엄마의 일들을 방관했다.

 내가 초등학생 때는 여자아이들의 목을 조르는 장난을 하는 남자아이가 있었고, 어떤 수업 시간에는 50대 남자 선생님이 얇은 막대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여학생들의 가슴 속으로 집어넣곤 했다. 그것을 넣어서 마음을 알아본다는 황당무계한 말을 지껄였다. 성희롱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사실도 몰랐던 아이들은 그를 학교에 찌르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술 취한 할아버지가 며칠에 걸쳐 계산대에 와서 말을 걸어 경찰에 신고했더니, 찾아온 경찰은 "그냥 이야기를 받아주면 되잖아"라고 이야기했다. 손을 덜덜 떨며 전화를 걸었던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민망해졌다.

 그 밖에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구구절절 말할 필요 없이 한마디로 이야기하고 싶다. "나도 겪고, 보았다"고.

 

 『82년생 김지영』은 대한민국 사회의 여성 차별로 인해 미쳐버린 여자의 이야기를 르포 형식으로 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맘충'이라는 이야기를 듣기까지의 결혼 생활까지, '김지영'이라는 여자가 겪은 모든 이야기를 순서대로 해나간다. 그러다 보니 대한민국 여자들이 느낄 수 있는 차별이 모두 모였다. 믿을 수 없고, 소름 끼치고, 화나고 어이없는 일들의 연속이어서, 진짜 이 모든 것들을 겪은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책을 끝까지 읽으며 내가 모르고 당했던 차별의 장면들을 기억해내면서, 이 책의 목적은 우리나라의 여자들 모두가 '김지영' 씨 같은 우울한 삶을 살고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김지영 씨가 겪었던 수많은 차별의 일부, 혹은 단 한 가지라도 겪어보거나 목격한 사람들에게 이 부조리한 세상을 인지하게 해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80년대, 산아 제한정책이 펼쳐지고 여아 낙태가 빈번했던 시대. 소설 속 주인공의 일부이고 전체였던 '김지영 씨들'은 많이도 울었을 것이고, 그나마 페미니즘이란 것이 조금씩 대두하기 시작한 지금도, 여전히 울고 있을 것이다. 소설의 끝, 화자이자 남자인 정신과 전문의는 김지영 씨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고. 그러나 뒤이어 그는 자신의 병원에 있는 여직원에 대한 차별적인 발언을 내뱉는다. 결국, 자신과 관계없는 다른 여자들에게는 은연중에 폭력적인 시선을 보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변화는 너무나 빠르고, 법과 제도가 바뀌어도 사람들의 가치관은 느린 걸음이다. 소설 속에서와, 현실에서, 이 차별을 인지하고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지만, 그것에만 희망을 걸기에는 이 사회가 많이 부족한 듯한 느낌이다. 여성을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들이 조금 더 부드러워지기를 바란다.

 


 


25쪽,

할머니의 억양과 눈빛, 고개의 각도와 어깨의 높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까지 모두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최대한 표현하자면, ‘감히‘ 귀한 내 손자 것에 욕심을 내? 하는 느낌이었다. 남동생과 남동생의 몫은 소중하고 귀해서 아무나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고, 김지영 씨는 그 ‘아무‘보다도 못한 존재인 듯했다. 언니도 비슷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68쪽,

어머니가 여자에게 연락해 택시비라도, 작은 선물이라도, 안 된다면 커피 한잔과 귤 한 봉지라도 전하고 싶다고 했지만 여자는 끝까지 거절했다. 김지영 씨가 직접 인사해야겠다 싶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다행이라며 대뜸 학생 잘못이 아니에요, 했다. 세상에는 이상한 남자가 너무 많고, 자신도 많이 겪었다고, 이상한 그들이 문제지 학생은 잘못한 게 없다는 여자의 말을 듣는데 김지영 씨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꺽꺽 울음을 삼키느라 아무 대답도 못하는 김지영 씨에게 전화기 너머의 여자가 덧붙였다.

"근데,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 많아요."

(…) 여자가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오랫동안 그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132쪽,

"아직은 아빠 성을 따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긴 하지. 엄마 성을 따랐다고 하면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겠지. 설명하고 정정하고 확인해야 할 일도 많이 생기겠지."

김지영 씨의 말에 정대현 씨는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손으로 ‘아니요‘ 칸에 표시를 하는 김지영 씨의 마음이 왠지 헛헛했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마음가짐이 달라진다는 정대현 씨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법이나 제도가 가치관을 바꾸는 것일까, 가치관이 법과 제도를 견인하는 것일까.

​165쪽,

"그 커피 1500원이었어. 그 사람들도 같은 커피 마셨으니까 얼만지 알았을 거야. 오빠, 나 1500원짜리 커피 한잔 마실 자격도 없어? 아니, 1500원 아니라 1500만 원이라도 그래. 내 남편이 번 돈으로 내가 뭘 사든 그건 우리 가족 일이잖아. 내가 오빠 돈을 훔친 것도 아니잖아.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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