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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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입학식에 참여한, 눈에 띄게 자그마한 아이는 힘도 없고 억세 보이지도 않았다. 통통한 볼살에도 불구하고 팔다리는 가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부터 흙 밟고 여기저기 노다니기보다는 집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거나, 만약 밖에 나간다 하더라도 친구들과 역할놀이를 하는 적이 많았다. 성향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뛰어다니고, 흙을 묻히며 선머슴처럼 노는 법을 몰랐다. 기본적으로 겁이 많았다. 나이가 먹고, 기적적으로 키와 몸이 커지면서 모든 것을 배워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딱 하나 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달리기'였다. 기록을 재고, 여럿이서 달리는 '체육대회'의 50미터 달리기 종목은 고역이었다. 키가 크고, 살이 붙어도, 스피드와 힘은 좋아지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달렸는데, 손등에는 도장하나 찍힐 날이 없었다. 순백색의 띠를 허리에 감는 멋진 광경은 한참 앞에서 벌어졌다.

 

 이것은 부끄럽지만 나의 이야기다. 이러한 기억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달리기와 관련된 책을 고르게 된 일은 놀랍고 또 놀라운 일이다. '하루키'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고르지 않았을 것이고, 여느 때와 같이 느낌에 따라 책장에서 지금의 상황에 가장 적절할 듯한, 그리고 즉흥적인 기분으로 책을 집어 들었을 뿐이었다. 어쨌든 나는 달리기를 매우 기피한다. 아, 어쩔 수 없이 달리거나, 잠깐 기분이 좋아 달리는 것, 가끔 반려견과 조깅 정도 하는 것은 제외하고 말이다. 기록을 재거나, 기록을 재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마음속에 '목표' 같은 것이 설정되는 레이스는 굳이 도전하지 않는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 책을 읽으니 묘한 궁금증이 든다. 끝까지 달리고 난 뒤의 "모든 걸 다 털어내 버린 듯한 상쾌함(22쪽)" 이 궁금하다. 이를 악물고 달려도 가질 수 없던 손등의 도장을, 한 번쯤 찍혀보기 위해서 매일 저녁 달리기 연습을 했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었을는지도 궁금하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제목만큼 책에는 풍성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달리기를 하면서 느끼는 감정, 기록과 안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마음, 몸의 성장과 마음의 변화까지, '달리기'라는 테마로 말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들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하와이, 뉴욕, 도쿄, 케임브리지, 홋카이도를 넘어, 아테네에 가서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기도 하면서, 그는 계절을 보내고 체감한다. 너무나 멋진 일이다. 걸을 때는 볼 수 없는, 걸을 때는 전혀 신경 쓰지 않던 모든 생각들이 머리속을 메울 것이다.

 

 그러나, '달리기'라는 단어 하나로 이 책을 설명해야 한다면 조금 아쉬울 수 있는데, 역자 후기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책은 "하루키 최초의, 어쩌면 최후의 (라고 썼지만 최근 출간된 책으로 이 말은 취소되었다) 회고록" 이라서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달리기라는 취미와 가장 잘 어우러질 수 있는 '음악'도 이 책에선 빠질 수 없다. 찰스 강변에서 함께 달리는 포니테일을 한 대학생들의 빛나는 모습을 보는 작가는 자신의 청춘을 회상하기도 한다.

 

 의외의,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감동이 밀려온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259쪽)"라는 묘비명을 쓰고 싶다는 작가는 한때 취미였던 '달리기'를 인생 전체로 밀어 넣는다. 그의 사회성은 '달리기'로 인해 길러졌다. 집중력과 지속력은 근육의 발달과 함께 몸에 배어 들었다."나라는 작은 존재 의의(171쪽)"는 '달리기'로 인한 통증이 되새겨주었다. 더 왈가왈부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달리기'는 '작가 하루키'라는 이름과도 같고, 실명 '무라카미 하루키'와도 같다. 그러니 진심 어린 이 책에, 달리기를 싫어하던 사람까지도 매료될 수밖에 없던 것이다.

 

 

36쪽
나는 달려가면서 그저 달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원칙적으로는 공백 속을 달리고 있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서 달리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공백 속에서도 그 순간순간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공백 같은 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진공을 포용할 만큼 강하지 않고, 또 한결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도 달리고 있는 나의 정신 속에 스며들어 오는 그와 같은 생각(상념)은 어디까지나 공백의 종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용이 아닌, 공백성을 축으로 해서 성립된 생각인 것이다.




122쪽
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 의식을 한 곳에 집중하는 훈련을 계속하면, 집중력과 지속력은 자연히 몸에 배게 된다. 이것은 앞서 쓴 근육의 훈련 과정과 비슷하다. 매일 쉬지 않고 계속 써나가며 의식을 집중해 일을 하는 것이, 자기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정보를 신체 시스템에 계속해서 전하고 확실하게 기억시켜 놓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 그 수치를 살짝 올려간다. 이것은 매일 조깅을 계속함으로써 근육을 강화하고 러너로서의 체형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작업이다. 자극하고 지속한다. 또 자극하고 지속한다. 물론 이 작업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만큼의 보답은 있다.

145쪽
나의 인생에도 그런 빛나는 날들이 존재했었을까? 그렇다, 조금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때 내가 긴 포니테일을 갖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그녀들의 포니테일만큼 자랑스럽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당시의 내 다리는 지금 그녀들의 다리만큼 힘차게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리라.

171쪽
`나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의 순수한 기계다. 기계니까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오로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이 말을 머릿속에서 만트라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글자 그대로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그리하여 자기가 감지하는 세계를 되도록 좁게 한정하려고 애쓴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겨우 3미터 앞의 지면으로, 그보다 앞은 알 수 없다. 내가 당면한 세계는 기껏해야 3미터 앞에서 끝나고 있다. 그 앞의 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늘도, 바람도, 풀도, 그 풀을 먹는 소들도, 구경꾼도, 성원도, 호수도, 소설도, 진실도, 과거도, 기억도, 나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물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3미터 앞의 지점까지 다리를 움직인다 - 그것만이 나라고 하는 인간의, 아니 아니지, 나라고 하는 기계의 작은 존재 의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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