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의 운동화
김숨 지음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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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동화였습니다. 타이거(TIGER)라는 로고가 쓰인, 270mm 사이즈의 흰색 운동화였습니다. 공장에서 수십 켤레, 아니 수백 켤레가 넘게 만들어진 내 쌍둥이 운동화들은 많은 이들에게 팔려나갔습니다. 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비슷한 운동화를 신었습니다. 내가 왜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냐고요. 세상에 수많은 흰색 타이거 운동화는 그 성질이 변해갔습니다. 시간과 상황과, 신는 사람에 따라서 말이지요. L의 발에서 20여 년 인생을 함께하면서 나는 진정으로 'L의 운동화'가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1987년,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쓰러진 내 주인의 발에서 벗겨져 한 짝을 잃었습니다."

 

 ​아마도 운동화가 증언을 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허황된 상상이지만 그리 허황되기만 한 상상은 아니다. 실제로 L의 운동화는 살아남았고 존재로서 증언을 대신하였다. 슬프지만, L이 살았던 생애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끝끝내 부서질 때쯤 한 복원가의 손을 거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운동화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이한열 열사 28주기를 기념하는 행사였다. 100여 조각으로 부서진 우레탄 밑창, 열화(劣化)가 일어나 끈적이고 깎이고 해진 운동화를 어떻게 복원해내느냐에 대한 어려운 결정이 복원가에게 맡겨졌다.

 

 

L의 운동화를 최대한 복원할 것인가?
최소한의 보존 처리만 할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둘 것인가?
레플리카를 만들 것인가? (21쪽)

 

 

『L의 운동화』는 그 과정을 소설로 담았다. 우리는 복원된 미술품이나 물품을 바라볼 때 어떤 생각을 하는가? 복원되기까지의 다난한 과정을 생각하며 그저 짧게나마 감탄할 뿐이다. 선 하나, 조각 하나하나, 전문가가 아니라면 그 정도까지의 생각에 미치질 않는다. (때로는 그것이 복원되었다는 사실조차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L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복원의 시점, 복원의 상태, 복원의 의미, 그 모든 것들을 함께 고민한다. 소설은 '마크 퀸'이라는 작가가 5년 동안 자신의 피를 뽑아 냉동고에서 형태를 유지하게 만든 「셀프(Self)」라는 자화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왜 '김숨' 작가는 'L의 운동화'에 관해 쓰면서 이 작품을 생각했을까. 청소부가 냉동고의 전원 코드를 뽑아 버려 훼손되었다가 다시 응고된 (그 흔적을 지니게 된) 이 작품은, 'L의 운동화'라는 특별한 사물을 복원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고민할 '복원의 의미와 가치'를 시사한다.

 

소설 속에서 복원가는 정체불명의 냄새를 맡는다. 화학약품 냄새도 아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그 어떤 냄새"를 작업실에서 똑똑히 느낀다. 마치 "사체가 썩고 부패하는 냄새"에 가깝다고 그는 표현한다. 죽어가는 운동화를 살려내는 순간, 냄새는 사라진다. 기성품이자 개인의 '사적인 물건'이었던 운동화는 비로소 '시대의 상징이자 유물'이 된다. 잘 벗겨지지 않기 위해 L만의 방식으로 꽁꽁 묶었던 운동화가, 최루탄 가스와 먼지를 머금은 운동화가, 증언이자 기록이 된다. 그리고 이는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언급되면서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기억은 신발에서 시작된다 (223쪽)", 그리고 또 다른 기억은 이 책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 이 책의 인세 일부는 이한열기념사업회에 기부된다고 합니다.

 

 

 

 

 

 

80쪽,
L은 걸을 때 왼발에 더 힘을 주었을까, 오른발에 더 힘을 주었을까? 쫓기듯 재게 걸었을까? 보폭을 크게 해 성큼성큼 걸었을까? 걸을 때 발가락에 더 힘이 실렸을까, 뒤꿈치에 더 힘이 실렸을까? 어릴 때 어머니는 연년생인 형과 내게 유니폼처럼 똑같은 옷을 사주고는 했다. 한날 한시에 똑같은 옷을 사 주는데도 형의 옷이 번번이 먼저 해지는 것을 나는 의아해했고, 습관뿐 아니라 성격과 기질이 그 사람의 옷과 신발과 가방 같은 물건에 고스란히 기록된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은 그 개인의 기록물이기도 하다는 걸.

100쪽,
내가 복원해야 하는 것은, 28년 전 L의 운동화가 아니다. L이 죽고, 28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버틴 L의 운동화다. 1987년 6월의 L의 운동화가 아니라, 2015년 6월의 L의 운동화인 것이다. 28년 전 L의 발에 신겨 있던 운동화를 되살리는 동시에, 28년이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28년이라는 시간을 바꾸어 말하면 고색(古色)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물을 복원할 때 고색을 살리는 것은 특히나 중요하다. 조형물에서 시각적으로 감지되는 세월의 흐름, 시간의 흔적이 고색이다. 인간이 고색을 선호하는 것은 영원성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중세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황색의 바니시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영원성을 추구하는 것은, 유한한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무한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심이.

110쪽,
L의 운동화를 그대로 두는 것이, 운동화를 신화화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L의 운동화는 시위 현장에서가 아니라 보관 과정에서 파손되었다.
L의 운동화가, L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L을 집어삼켜서는.

194쪽,
나는 한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L의 운동화 끈을 풀 것인지, 맑 것인지. L의 운동화를 내 작업대로 가져온 지 두 주가 지나도록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L의 운동화 끈은 독특한 방식으로 묶여 있다. L의 운동화를 예술 작품이라고 가정할 경우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끈이다.
나는 끈을 풀 자신은 있지만, 묶을 자신은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L이 묶은 방식 그대로 묶을 자신이.

254쪽,
"아직까지는 쉰한 분이 살아 계시지만 다들 연세가 있으시니까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시겠지요? 한 분, 한 분 그렇게 세상을 떠나, 한 분밖에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 오겠지요? 단 한 분 밖에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 그리고 결국 단 한 분도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 오겠지요? 그분들이 다 돌아가시면 누가 증언을 할까요?"
그래서 기록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을 나는 구태여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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