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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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갈 수 있는 남다른 친화력을 가진 사람을 보면 부럽다. 그래도 저 사람에게도 스트레스가 있겠지, 하는 볼멘소리로 포장하고는 있지만, 분명히 이건 부러운 마음이다. 내향적인 사람은 목소리가 작거나 어떤 상황에도 소심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만나는 자리에서 외향적인 사람과 달리 '에너지'를 빠른 속도로 뺏긴다고 했던가. 그런 점에서 나는 지극히 내향적인 사람이라서, 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눠야 하는 자리에선 되레 피곤함을 느낀다. 그런 내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읽게 될 줄은 몰랐다.

 ​양귀자 작가는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인간상을 그려왔다. 그의 대표작인 『원미동 사람들』도 '사람'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라는 소재는 그의 문학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듯하다. 그러나 이 '인물 소설'이라는 것은 여타 소설과는 특이하게 다른데, 하나의 인간과 그의 인생을 그리는 것도 아닌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권에 모두 모아놓고 있다는 것이다. 단행본 한 권의 네다섯 페이지 될만한 짧은 글들이 한 아름 묶여 있는 이 책에는 남녀노소 가지각색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그득하다. '모든 대화를 군사적으로 변용시키는 박영국 씨', '버릇처럼 신도림역에서 폴짝 뛰어내려 버린 양민호 씨', 그리고 이름을 거론하진 않지만, 무척 특이하고 무척 재미난 이들, 택시 운전사, 시인, 동네 예술가, 어머니, 아버지 ……. 그들을 그리는 작가의 시선은 아주 따뜻해서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재미있는 건 이 사람들에 대한 글들이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에서 무척 자유롭다는 점이다. '인물 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분명 상상이 가미되었거나, 온통 허구이거나 할 테지만, 어쩌면 이 책은 소설의 탈을 억지로 입힌 것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에세이'라는 느낌이 진하게 나기도 한다. 어쩌면 자전적 소설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까. 짧은 글들에서 언뜻언뜻 드러내는 화자의 신상에 주목한다면, '에세이'와 '소설'에서 줄타기하는 소설의 참 재미를 느낄 수 있기도 하다.

 사실은 물어보고 싶다. "양귀자 선생님, 이 사람들 실제로 있는 것 아니에요? 진짜 경험한 이야기 아니에요?" 그러나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은 작가는 실제로 길을 걸으면서, 세상을 걸으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힘이 되는 무엇을 얻었을 것이란 사실이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관찰하는 눈이 아주 깊다는 사실도.

​ "언제, 여기,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일까, 그 붉은 목단꽃 이불 밑에서 하룻밤 짧은 꿈을 만지다가 다시 환한 세상으로 나갔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95쪽, 아슬아슬했던 시절, 목단꽃 이불 밑에 숨은 사연)​

 책의 문장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하니, 또 작가의 글에 폭 잠겨 들게 된다. '붉은 목단꽃 이불 밑에 숨은 사연'과 삶에 대한 질김을, 시인의 주파수를, 이야기가 스르르 들어와 소설이 되는 순간을 말하는 그 문장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가능하면 모두 다 적어 자랑하고 싶지만, 책의 문장들은 이상한 소유욕을 발동시킨다. 내가 만약 한 편의 글을 쓸 수 있는 능력과 여력이 된다면, 정말이지 이런 글을 쓰고 싶다.

 

 

88쪽, 아슬아슬했던 시절, 목단꽃 이불 밑에 숨은 사연
아마도,더듬어 보자면, 푸른 비단에 구름처럼 풍성한 붉은 목단꽃이 수놓아진 이불이었을 것이다. 이불깃은 빳빳하게 풀 먹인 광목이었으며, 바늘이 누비고 간 실뜸의 간격은 자로 잰 듯이 정확했었다. 붉은 목단꽃 이불의 그 홑청은 유난히도 자주, 장대로 곧추 세워놓은 빨랫줄에 널려 깃발처럼 펄럭이곤 했었다. 풀 먹인 그것을 자근자근 밟아대는 심부름도 참 많이 했었다. 잘 개킨 홑청 위에 옥양목 수건을 깔고, 그 위에 서서 나는 책을 읽었다. 책에 빠져 있다가 문득 내려다보면 밟아야 할 풀 먹인 홑청은 저만치 있고, 내 작은 발은 맨 방바닥만 헤매고 있었는데.

105쪽, 우리를 견디게 하는 것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는 내가 보호해드려야 할 지경으로 늙어버린 어머니의 장탄식을 듣고 나면 나는 불현듯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기운이 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괜히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말하고 싶거나 어깨가 빠지는 듯이 아프다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마음까지 불끈 솟아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이 사십을 앞두고 철이 없어도 유분수지 노모의 마음을 아프게 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철이 좀 든 나는 대신 이렇게 말함으로 해서 조그만 효도를 하기는 한다.
"엄마, 인절미 구워 먹을까요? 엄마가 구워주면 더 맛있더라."
그러면 허리 굽은 내 어머니는 당장에 얼굴이 환해지면서 부엌으로 달려가시는 것이었다.

116쪽, 책 사는 사람들
예전과는 달리 현대의 빛나는 과학문명은 고리타분한 독서 말고도 몰두할 수 있는 대상을 얼마든지 많이 만들어내고 있다. 영화며 비디오 또는 컴퓨터게임 등, 독서가 줄 수 있는 은은한 향기에 비하면 현대의 오락들은 너무나 강렬해서 한 권의 책이 그 강력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선택되어지는 것은 차라리 경이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런 까닭에 책을 펴내는 출판사는 늘 전전긍긍이다.


152쪽, 그 여자의 고정관념
긴 밤을 지새우고 났을 때, 동쪽 창에 발갛게 번져오는 햇살을 보았을 때, 그녀는 문득 동아줄 같은 삶의 질김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이란 것은 하루도 빠짐없이 잘도 찾아오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망연히 누워 있는데 이윽고 부지런한 이웃의 비질 소리, 아침잠 없는 갓난아이의 칭얼거림, 또한 근심 없는 사람들의 청명한 말소리들이 간단없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 살아있음은 뭐랄까, 지루한 반복 외 그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그래도 밝음은 동시에 희망 같은 것을 안겨 주기도 하였다.


186쪽, 꽃 지는 누이 - 들어가면서
제아무리 이야기 가닥이 많고 기둥 줄거리가 탄탄한 소설이라 해도 그것의 시작은 미미한 징후, 한 순간의 분위기에서부터 일구어진다. 현실의 그 미미한 징후와 찰나의 느낌은 마음속으로 들어와 오래도록 기척을 내며 꿈틀거린다.
나는 가만히 기다린다. 마음속에 터를 잡은 그것들이 저희들끼리 부딪치며 반죽이 되고 이스트 넣은 밀가루처럼 부풀어 오르기를, 그리하여 나를 충동질하기를. 여기 모인 이야기들은 말하자면 미미한 징후에서 하나의 소설로 가는 중간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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