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 발상에서 좋은 문장까지
이승우 지음 / 마음산책 / 2013년 3월
평점 :
판매중지


 


책을 읽다 보면 독서에 대한 애착이 생긴다. 그러다 보면 무엇인가를 못 견디게 쓰고 싶어진다. 뚜렷한 것은 없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수다 떨듯 끄적이는 잡글이든 어딘가 배출할 곳이 필요해진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서평으로 그 답답함을 해소해왔다. 처음에는 한 줄 한 줄이 막막했고, 한편의 글이라는 느낌보다는 순간순간 떠올리며 쓴 메모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했다. 지금은 어떤가? '어떻게든 쓸 수는 있다'라는 생각은 하게 되었다. 결과물은 어떤가? 글쎄, 대단한 글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솔직하게 쓰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렇게 오랫동안 서평을 블로그에 적다 보니,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책'에 기대지 못하면, 쓰기가 힘들어졌다. '어떻게든 쓸 수는 있다'라는 생각은 갖고 있지만, 쓸 때마다 머뭇거리게 되었다.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오래전이었다. 이승우 작가의 책을 하나하나 고르고 읽기 시작할 무렵, 가장 먼저 보였던 책이었다. 그러나 '쓰기'에 대한 궁금증과 욕망이 더 커졌을 때로 미뤄두고 싶었다. ​'소설 쓰기'에 관련된 책이지만, 무엇인가를 '쓰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문학을 읽는 것에 대한 힌트도 얻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소설 쓰기'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소설 읽는 것을 가장 사랑하는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면 그보다 황홀할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볼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덤벼들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소설 쓰기는, 어떤 글을 쓰는 것보다도 집요하고 꾸준한 작업이다.

 

 그러니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라는 제목에 혹하여, 소설 작법을 배우거나 소설을 쉽게 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지 않는 편이 좋다. 이승우 작가는 '문학청년들을 향한 시적 노트'라고 이 책을 표현했으나, '문학청년들을 향한 호된 강의'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 '쓰는 기술'보다는 '쓰는 정신'을 더 강조하는 강의다. 절대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기대가 모든 것을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채찍질하는, 무섭지만 (맞는 말만 하는) 강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의 멋들어진 문장보다 앞서야 하는 것은 자신이 쓰는 소설과 일치된 '삶'이다. 그리고 그 삶을 지겨울 정도로 구질구질하게 관찰하고, 치밀하게 설계해야 한다. 그리고 문장을 장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정확성'이다." 소설가가 문장을 쓰는 것부터 한 권의 소설을 완성해내기까지의 과정을 꼼꼼히 따져 설명해가면서 끝엔 이렇게 묻는다. "이렇게 힘들지만, 해볼래? 그러나 신중하게, 확신 있게"

 그러나 겁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책의 초반, 그는 소설 창작에 대한 '운명론'을 부정한다. 소설 쓰기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 누가 하는 것인가. "(소설을) 읽은 사람만이 쓴다. 잘 읽은 사람이 잘 쓴다." 결국은 문학을 읽는 것에서부터 소설 쓰기는 시작된다는 말이다. 소설 지망생에게 권하는 '필사'도 이런 주장의 연장선에 있다.

 

 날카롭지만 시원한 책이다. 좋아하던 이승우 작가의 신념이 더없이 존경스러워지기도 한다. 단언컨대 정말 당찬 포부를 가진 사람들만이 덤벼야 하는 것이 '소설 쓰기'다. 그 당찬 포부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 책은 특별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쓰기'에 대한 작은 의문을 가진 (아직 읽기에 머무는) 나에게는, 더 잘 읽고 세상을 좀 더 바라봐야겠다는 투지를 선사해주었다. 아직 나는 출발선 앞에서 달리기를 준비하며 준비운동을 하고 있다. 소설가의 꿈을 가지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의 정신을 본받아 찬찬히 밑그림을 쌓아 올릴 것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들, 이미지나 사상,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영혼에 다름 아닌 그것들에 실체를 부여하는 육화 肉化의 과정이다. 막연한 것, 추상적인 것, 모호한 것, 자기 자신도 아직은 무언지 확실하지 않은 것, 그런 것을 가지고 소설을 시작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써나가다 보면, 지금은 모호하고 뭔지 모르겠지만, 어떤 모양인가가 만들어지겠지, 어떻게 되겠지, 하고 기대하지 말라. 어떻게 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한 편의 소설은, 그 소설이 탄생하는 순간까지의 그 작가의 삶의 총체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온다. 축적해놓은 것이 없으면 나올 것이 없다. 차면 넘치는 이치다. 일정한 기간의 소설 창작 교육이 소설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까지 축적해온 그의 삶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 구질구질함이 소설 쓰기의 과정이다. 구질구질한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소설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 임동헌의 소설 ​「아이 러브 토일럿」에는 슈퍼마켓에서 산 여행용 화장지와 주유소에서 선물로 제공한 화장지의 장 수를 비교하는 인물이 나온다. 소설가는 아마 그 글을 쓰기 전에 실제로 두 화장지의 낱장을 헤아렸을 것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런 과정이 포함되어 있는 작업이다.

구체가 소설의 핵심이다. 거듭 말하지만, 소설은 육체여야 한다. 그러니까 소설 쓰기는 전혀 고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고상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 또한 고상하지 않다. 삶이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한 것처럼 소설 쓰기 또한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하다. 손에 흙을 묻혀가며 배추를 뽑고 손에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김치를 담근다. 배추를 밥상에 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흙을 손에 묻혀가며 배추를 뽑고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김치를 담가야 한다. 소설은 김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배추 뽑는 손, 고춧가루 범벅이 된 손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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