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의 여인
이순원 지음 / 문예중앙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꽤 오래전부터 선생을 알아왔다. 고백한 적은 없지만, 선생을 이룬 것 중에 내가 은밀하게 샘내는 것이 있다. 선생의 대관령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있다고 해도 선생처럼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선생은 선생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대관령을 말한다."

 

황정은 작가의 추천사가 인상깊었다. 그리고, 소설을 읽는 내내 줄곧 그 말에 수긍하게 되었다. 평소에 여러 책을 접하면서 항상 생각하던 것이 있는데, 소설가에게 모든 경험은 극복의 대상이든 소중한 것이든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것이다. 이순원 작가의 경우, 그 경험은 '고향'이란 곳에 있으며, 아주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이전에 읽어봤던 작가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첫사랑'과 '고향'은 중요한 코드로 등장하며, 둘에 대한 주인공의 감정은 동일하다. 되돌아갈 순 없지만 아련한 추억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고 각자의 생활을 겪으면서 잊게 되었던 그것들은, 어느 순간 우연히 물꼬가 트인듯 흘러나온다. 하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또 하나가,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것이다. 그때는 첫사랑인지도 몰랐던 '연희'와 대관령을 떠돌았던 기억도, 그의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오수도리 산장과 길 아저씨에 대한 기억들도, 그들과 나눴던 모든 대화의 기억들도 '고향'과 '첫사랑'이라는 이름 속에 아로새겨진다. 왜 잊어버렸는지 모를 아련한 기억들과 순정한 시간들은 대관령의 따뜻한 풍경 속에서 그려진다.

 

사랑했던 누군가나 고향의 어떤 사람들이나, 누구 하나 더 부각되는 것은 없이, 작가는 순수하고 다정하게 그 추억들을 차곡차곡 꺼내보인다. 그리고 이루어지지 못하고 흘러갔던 것들에 대해 슬퍼하거나 회한하는 마음 없이, 그저 그렇게 지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다독인다. 단 하나 안타까운 시선이라면, '연희'의 아버지이자 한번도 주목받지 못했던 '유강표'라는 존재다. 빠르게 변화해가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던 아쉬움은 소설 속에서 가장 진하게 드러나는 감정이지만, 그것 또한 극복의 여지가 있기에 아주 슬프지만은 않다.

 

과하지 않은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차분하게 쓰여진 글은 누구에게나 편안하게 읽힐 것 같다. 특히 대관령의 풍경과, 일본의 삿포로의 풍경이 다른듯 겹쳐지는 절경이 일품이었다.

 


 


 

45쪽,
"지금 기자님께서 시간이 순정하다고 하신 말은……."
저쪽에서 말을 하다가 중간에 끊기에 주호도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가 싶어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제가 지난번 삿포로에 갔을 때 연희도 똑같이 그렇게 말했거든요."
"시간이 순정하다고 말인가요?"
"예. 지난번에도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대관령에서 참 힘들게 자랐어요. 집안 형편이 안 좋아 연희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는데 그래도 그때가 자기한테는 가장 순정한 시간이라고 했어요."
"그랬군요."
"그냥 순정하다는 말은 누구나 쓰는 말이지만 시간이 순정하다는 말은 쉽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닌데, 기자님이 그렇게 말하니 지난번에 연희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요."
"듣고 보니 그 말이야말로 순정하군요."


100쪽,
저마다 아버지들이 산에서 나무를 베어와 톱과 자귀와 대패로 아들의 스키를 만들어주었다. 스키 앞머리는 불에 바짝 달구어 힘을 주어 휘었다. 스키에 신발을 끼우는 앞 바인딩은 깡통을 오려서 만들고 뒤축을 고정시키는 뒤바인딩은 철사를 꼬아 앞뒤로 끈을 묶어 신발을 고정시켰다. 스키화는 눈 위에서 신는 고무장화를 사용했다. 검정운동화보다 장화가 뒤축이 높고 든든해 나무스키를 발에 묶기가 좋았다. 양말도 두툼하게 신을 수 있었고, 신발 속에서 발목을 놀리기도 편했다. 스키폴도 대나무로 만들었다.

160쪽,
"열심히 일만 하며 지나가는 시간이나 인생을 즐기며 지나가는 시간이나 다 똑같이 귀한 `그때의 시간`이지. 열심히 일하고 나중에 폼 나게 즐기려 하면 `그때의 시간`은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는 거야. 그건 청춘의 시간도 마찬가지고 장년과 노년의 시간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인생은 그때의 시간으로 즐겁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하는 거라고. 인생에서 다음이란 미래의 시간이 아니라 언제나 현재 접근할 수 없는 과거나 마찬가지의 시간이지. 지금 할 수 없는 것을 다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다음에 가면 그건 또다시 그때의 시간으로 접근할 수 없는 다음이 되는 거지."


196쪽,
대관령에는 어느 여인이 입다가 벗어 놓은 흰 치마처럼 겹겹이 눈이 내렸는데, 멀리 바다는 하늘보다 더 새파란 모습으로 겨울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는 트럭에서 내리지 않고 연희만 내리게 했다. 연희가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바다 멀리 엄마를 부를 때 그는 연희가 누구에겐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민망하지 않게 일부러 창문을 더 꼭 닫고 반대편 하늘과 맞닿은 흰 산을 바라보았다. 산이 아무리 험해도 눈이 많이 내리면 산의 전체 모습이 곡선처럼 부드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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