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할 권리 -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인문학 선언
정여울 지음 / 민음사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는 이 제목을 보고 '공부'라는 단어의 의미를 스스로도 제한해놓고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틀 안에 갇혀 있는, 이를테면 학력을 쌓아올리는 행위 같은 것들이요. 그다음은 저자의 이름을 보고 '공부'라는 단어에 새겨져 있는 폭넓은 정의를 떠올렸죠. 비록 우리에겐 '공부'의 의미가,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퍽 제한적인 의미의 것이 되어버렸지만, "과거와 현재의 문제를 깨닫고 미래의 삶을 개척"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공부'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정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어쩌면 지긋지긋한 그 이미지를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소 거창한 제목으로 시작한 책의 느낌은, 그동안 정여울 작가의 다른 책에서 본 느낌과 비슷했어요. 책과 인문학이 적절하게 조합된, 독서 에세이 같은 느낌이랄까요. 사실은 최근 독서 에세이를 멀리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의 느낌만 계속 읽으면 뭐 해? 내가 읽지! 하는 마음으로요) 처음에는 살짝 투덜투덜 대기는 했지만, 참 어이없게도 빠른 시간 안에 작가의 글에 설득당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공부'를 통해 자신의 내면으로 받아들인 것들을 적절하고 시원시원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 솜씨, 고작 한 페이지와 한 문장에 거론된 책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그 책에 매료되어 한 번이라도 검색해보고 읽어볼 수 있게 만드는 설득력. 그런 점에서 정여울 작가의 연륜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책의 내용을 채우고 있는 작가의 수많은 문장들 속에서, 제가 가장 잊지 못할 부분이자 가장 공감했던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단어, '동경(Sehnsucht)'은 작가에 의해 이렇게 표현되었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으며 고(故) 박완서 선생님을 향한 오랜 동경을 해소하였고, 어린 시절과 대학 시절 가슴 쿵쾅거리며 좋아했던 책의 작가들을 (지금도) 사랑하지만 동경의 온도가 달라졌다고. 그 뜨거웠던 가슴이 식었다 끓었다 하는 루틴이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것에 서운해하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온도가 조금 낮아졌다고 해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죠.

 

 

내가 무엇을 아는지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모르면서 아는 척하며 살아왔는지를 깨닫는 순간 진짜 배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여울 작가는 그가 읽은 수많은 책들과 작은 경험들을 통해, 이 힘든 세상에서 '공부할 권리'를 되찾으라고 전언하고 있어요. 서울대학교,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등의 내용들로 채워지는 그의 프로필이지만, 작가 자신이 때때로 찾아오는 외로움과 절망감을 이겨내게 만든 것은 '문제 풀이의 기술'이 아닌 '진짜 공부'였음을 에필로그에서 밝히고 있죠.


'진짜 공부'란 무엇일까요. 어감은 좀 이상하지만, 내가 정말로 즐겁게 몰입할 수 있고 신명 나게 빠져들 수 있는 위로의 것이 '진짜 공부'가 아닐까요. 물론 '문제풀이의 기술'도 이 개떡같은 세상에 필요하지만, 작가는 인생을 공부할 수 있는 수많은 순간들을 놓치지 말라고 조언하고 있어요. 삶의 숭고한 가치를 배울 수 있는 시간, 나약함과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용기,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성숙한 마음가짐을 말이죠.

 

45쪽,
『일리아드』를 읽으며 의아하면서도 더욱 감동적이던 대목은 작가 호메로스의 태도입니다. 호메로스의 조국은 그리스였지만 그는 자기 나라 편에 서서 전쟁을 그리지 않습니다. 그가 아킬레우스의 최후나 파리스의 최후가 아닌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이 거대한 이야기를 끝맺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어느 편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은 후 남기는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헥토르를 잃고 목놓아 우는 트로이 사람들의 눈물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우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눈물을 닮았습니다.

69쪽,
정의가 실현되기 이전에 가장 많이 일어나는 일은 바로 `불의(不義)`의 사건입니다. 진정한 정의가 실현되기에 앞서 일어나는 사건은 참을 수 없는 불의인 경우가 많지요. 사람들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제우스가 고의로 불을 숨겼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우스가 불을 숨겼다"는 단순한 문장 속에는 엄청난 폭력과 압제, 불의와 억압의 상처가 아로새겨져 있지요.

187쪽,
끝나지 않은 이 공포와 절망을 끊어낼 수 있는 첫 번째 열쇠는 바로 우리의 관심입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말했지요. 역사의 가장 끔찍한 비극은 나쁜 사람들의 짜증 나는 아우성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의 오싹한 침묵 때문에 일어난다고. 우리는 끊임없이 분노하고 고발하고 저항해야 합니다. 일본 정부가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한국 정부가 두 손 두 발 다 들 때까지, 역사의 수레바퀴가 제대로 돌아가 정의와 자유의 깃발이 바로 서는 날까지.

343쪽,
프로필은 어쩌면 내가 누구인지를 최대한 가리기 위한 `분장술`인 것 같습니다. 제 프로필에는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면서 느낀 절망감, 오랫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느낀 모든 좌절감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한 번도 일을 쉰 적이 없지만, 겉으로는 `문학평론가`라는 정체성을 고수했지만, 사실은 늘 불안했지요. 늘 일은 했지만 어디에도 소속된 적이 없으니, 저는 항상 허공에 매달린 덧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 쓸쓸함의 밑바닥에는 `공부로는 취직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