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앤드루 포터 (지은이), 김이선 (옮긴이)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 원제 The Theory of Light and Matter

 

 

 남겨진 생각들  

 

 

 제목을 보면 과학책인 것 같지만, 과학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과학과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옮긴이에 의하면, '리처드 파인만'의 과학 이론 중 하나인 <양자 전기 역학 : 빛과 물질에 관한 이상한 이론>이란 게 존재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어느 누구도 빛 입자가 자신의 경로를 선택하는 과정을 알지 못하며, 특정 입자의 경로를 예측할 수 없다." 나는 이 글을 볼 때까지 과학에 해당하는 어떤 지식의 문장이, 인생에 대입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을 다루는 소설들은 많다. 살면서 벌어지는 불가피한 우연들, 그것에 대처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많은 소설이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묘사의 방식은 작가마다 문체마다 현저히 다른데, 작가 '앤드류 포터'의 방식은 무척 특이하다. 어두운듯하면서도 온전히 까만색은 아니고, 밝게 빛나고 있지는 않다. 시간이 흘러 지나갔지만,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을 회상하는 방식이 그렇다. 길을 걸어가다 숨겨져 있던 구렁 속으로 빠지듯 아무렇지 않은 일상에서 떠오르는 서늘한 기억들을 (「구멍」), 그와 같이 어떤 사물 혹은 글자로 순간의 선택에 대한 당위성을 찾아갔던 기억 (「코요테」) 을, 작가는 부드러운 손길로 건져낸다.

 후회는 필연적으로 우리 곁에 다가온다. 후회 없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들은 흘러간 것을 그리워하거나 되돌리고 싶다는 것보다는 그저 응시하고 있다. 누군가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또 다른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도, 얼마만큼의 개입이 필요한 것인지 (「아술」) , 그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면서도 행하게 되었던 미련한 모든 일과 자기방어에 대하여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느꼈던 것을 응시하며, 아주 건조한 말투로 그려낸다. 후회가 남은 기억들은 현재에 와서야 아주 큰 타격으로 우리의 일상을 내리친다. "그럴 때마다 발을 디디는 곳을 보지 않았던, 아래쪽에 무엇이 있는지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던 우리의 대책 없음에, 우리의 눈먼 행동에 아직도 몸이 떨려온다." (「외출」) 그때는 대단치 않다고 생각했던 모든 순간의 말과 행동들이, 삶에 이면 속에서 툭 하고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한 움직임을 느껴보지 않은 이들은 아마 없을 것이기에, 이 소설들은 마음 속으로 깊이 다가온다.

 

 

 그러나 어딘가 싸한 이야기들이 어둠 속에서 빠져나와 빛나는 어떤 것으로 환기되는 것은 이런 부분들이다. "그 불빛, 자동차,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그것은." (「폭풍」), 혹은 "돌아왔네", "돌아왔어" (「코요테」)의 대화들 속에서, 툭툭 털어내는 손짓을 우리는 본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회상 속에서도, 그때의 기억을 품을지라도 그것에 끔찍해 하며 살아가기에는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흘러가는 시간을 어쩔 수 없음을, 지나간 기억을 바꿀 수는 없음을 인지하고.

 

 

 끊어 읽어도 좋은 '단편'들이지만,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읽어내도 좋을 것이다. 단편과 단편이 비슷한 부분으로 연결되고, 마지막 문장들은 그저 책을 덮어버릴 순 없게 만드는 진한 여운들이 있다. 이제는 책장에 쏘옥 박혀 있는 그의 신작 장편 『어떤 날들』을 읽어봐도 좋을 듯하다.

 

 

괜찮을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나는 내 품에 안긴 그녀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낀다. 나는 그녀가 아술에 대해, 이제 그 아이에게 벌어질 일에 대해, 그 아이의 부모에 대해 해야할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자기 집 부엌에 서 있는 그 아이의 아버지, 전화기 너머로 멀게 들려올 그의 목소리를 상상한다. 괜찮을 거야, 나는 다시 말한다. 그냥 찰과상이야. 그러나 나는 뻣뻣하게 굳어버린 그녀의 척추를, 등의 긴장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렇게 몇 분여를 보낸 후에야 우리는 마침내 뒤돌아 우리의 지나간 행동을 직면한다. (89쪽, 아술)


나는 그 순간, 그제야 우리 사이에 지금껏 말을 넘어선 교감이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나는 그때 그가 너무나 쉽게 나를 이해해버리는 것 같아 화가 났지만, 그가 훗날 내게 그랬다. 만약 내가 정말로 모든 일을 끝내고 싶었다면 자기에게 전화를 하거나 편지를 쓰는 것으로 끝을 보았을 것이라고, 자신의 아파트로 직접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날 밤 그의 아파트 밖 거리에 서 있을 때 나는 내가 그와의 모든 것을 끝내고 싶어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믿은 것은 그래야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내게 그런 물음을 던지고 나를 바라봤을 때 내가 대답하지 않은 것은 고집이거나 고의적인 거부가 아니었다. 그가 그 순간,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122쪽,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태너와 내게는 좋은 여름이었다. 최고의 여름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금요일 밤이 오기 전까진 거의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었다. 푹푹 찌는 날씨 탓에 낮에는 집 안에 틀어박혀 공포 영화를 보고 아이스티를 들이부었으며, 밤이면 태너가 모는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돌아오는 금요일에 할 일을 계획했다. 우리가 시간을,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고 부모님들은 말했는데, 그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 싶었다. 내년이면 고등학교 졸업반이 될 터였기 때문에 벌써 우리는, 우리가 별 볼일 없는 정점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 여름은, 우리가 아직 용돈을 받고 일자리를 얻지 않아도 될 만큼 어릴 수 있는 마지막 여름이었다. (174쪽, 외출)

잠시 나는, 어린 시절 그곳에 앉아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오기를 디라디너 지난날의 늦여름 오후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언덕 아래로 아버지의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보일 때 누나가 미소짓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기쁨처럼 보였다. 그 불빛, 자동차,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그것은. (251쪽, 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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