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과 유진 푸른도서관 9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금이 (지은이) | 푸른책들 | 2004-06-21

 

 

 

남겨진 생각들  

 

 

 작은 유진은 그때의 일을 모두 잊었다.

 큰 유진은 그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한다.

 작은 유진의 부모는, 아이의 몸을 벅벅 문지르며 기억을 씻겼다.

 큰 유진의 부모는 "사랑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번번이 다독였다.

 

 

 유치원에서 일어난 큰 사건을 함께 겪었던 '유진'과 '유진'. 그들이 중학생이 되어 같은 교실에서 만났을 때, 그들의 부모가 각각의 방식대로 묻어둔 기억은 괘씸하게도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다. 둘에게 그때의 기억은 결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을 '소름 끼치는 기억'이지만, 떠오른 기억에 대한 대처는 그 둘이 확연히 다르다. 기억을 온전히 보전하고 있던 '큰 유진'은 담담히 이야기한다. '작은 유진'은 '큰 유진'의 이야기를 듣고, 조각조각 나뉜 기억에 괴로워한다.

 

 나무의 옹이가 뭐더냐? 몸뚱이에 난 생채기가 아문 흉터여. 그런 옹이를 가슴에 안구 사는 한이 있어두 다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162쪽)

 날카로운 것에 베여 상처가 나면 딱지가 생긴다. 흉한 딱지가 보기 싫어 자꾸 긁고 떼다 보면 더 선명한 흉터가 생긴다. 『유진과 유진』은 (나쁜) '기억'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상처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유진과 유진, 그들의 부모는 자식의 상처를 어떻게든 잊게 해주려 안간힘을 썼고, 그 방법은 확연히 달랐다. 아마도 부모들은 서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달랐다. 한쪽은 미숙했고, 한쪽은 성숙했다. 무조건 잊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음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시간은 기억의 정착제가 아니라 용해제다". 기억과 시간이 만나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큰 작용이 일어난다. 기억은 시간에 의해 잊히기도 왜곡되기도 한다. 스스로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두 소설은, 꼭꼭 묻어둔 판도라의 상자는 언젠가 틈이 벌어지게 마련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그 틈으로 들어가 스스로 왜곡해 묻어둔 기억을 마주하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주인공 '토니', 그리고 어떻게든 묻어둔 기억을 '큰 유진'에게서 발견하는 『유진과 유진』 속 '작은 유진'의 배신감은 무척이나 컸을 것이다. 그러나 『유진과 유진』에서 중요한 점은 '배신감'이 어느 쪽으로 향하느냐는 것이다. 사건 당시, '유진이'들은 사리분별이 부족한 어린아이였고, 기억을 묻은 주체는 '부모'였다. 이 소설이, 단지 '청소년 소설'에만 머무르지 않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사랑해, 네 잘못이 아니야.". 이 시대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해야하는 말은 이것이 아닐까?

 소설의 후반부, 같은 기억을 공유한 '유진과 유진'은 '건우 엄마'를 이야기하면서 따뜻한 손을 맞잡는다. 표리부동한 인간들에게 분노하고, 아픔을 승화시키며 이 둘이 함께 걸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이들의 입장, 그리고 부모들의 입장, 기억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청소년 소설'이라는 장르에 맞게 담담히 풀어낸 『유진과 유진』. 내가 읽어본 최고의 청소년 소설이다.


 

다음날, 난 그 일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누군가 날 도와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해 보았자, `네 잘못이야`라는 대답을 듣게 될 것 같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부터 그랬다. 초등 학교, 아니 더 전인 것 같다. 그때부터 내 편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를 지키는 방법은, 엘리베이터의 괴물처럼 더 강력한 것을 상상하거나, 공부 잘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전교 1등도 나를 지켜주는 완벽한 방패나, 갑옷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53쪽)

나는 그 날 밤, 엄마와 아빠에게 그 이야기를 다시 해야 했다. 엄마가 울음을 터뜨리며 나를 안았고, 아빠는 주먹으로 벽을 쳤다. 그때 내 기분은 …… 슬프고 무서우면서도 달콤했던 것 같다. 세 살짜리 동생한테 엄마 아빠의 사랑과 관심을 빼앗긴 채 외로움에 떨던 때였으므로, 엄마 품에 안긴 채 울음 섞인 사랑 고백을 듣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다.

"사랑해, 사랑해. 엄마가 우리 유진이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거 알지?" (73쪽)

"니가 그 일을 기억 못 해서, 느이 식구들은 영영 그러길 바랬지만 나는 내내 걱정이었다. 늙어서 노망난 것도 아닌데 파릇파릇하니 자라는 것이 지가 겪은 일을 기억 못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단다. 다 알구, 그러구선 이겨내야지. 나무의 옹이가 뭐더냐? 몸뚱이에 난 생채기가 아문 흉터여. 그런 옹이를 가슴에 안구 사는 한이 있어두 다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외할머니가 내 등판을 쓸었다. 갑자기 내 몸 군데군데 상처가 난 것처럼 여겨졌다. 엄마가 살갗이 벗겨지도록 내 몸을 닦았던 건 그 상처를 없애기 위해서였을까? (162쪽)


건우엄마가 했다는 말을 할 때 작은유진이는 내 손을 꽉 잡았었다. 그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엄마의 분노보다도 소라가 껴안아 줬을 때보다도 진정으로 위로 받는 느낌이 들었다. 이 아이는 또 다른 나인 것만 같다. 나는 작은 유진이의 손을 찾아 잡았다. 조그맣고 말랑말랑한 손의 느낌이 좋았다. 나는 그 애의 머리 위에 뺨을 기대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기대어 잠을 잘 수 있는 것, 이것만은 잘못된 일 같지도 후회스럽지도 않았다. 나는 아슴푸레한 새벽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241쪽)

나는 못을 두드리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엄마에게 달려들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엄마는 허깨비처럼 내가 흔드는 대로 흐느적거렸다. 어하면 그대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엄마에게 떨어진 나는, 이겼으면서도 눈두덩이가 찢어져 바닥에 누운 상대편을 볼 수 없고, 입이 부어 터져 승리의 기쁨을 말할 수 없는 권투선수 같은 기분이 돼 간신히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침대 속으로 들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그제서야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주 오래 묵은 것 같은 슬픔이 실 꾸러미 풀리듯 끝도 없이 울음 속에 섞여 들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다.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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