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0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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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녜프 (지은이) | 이항재 (옮긴이) | 민음사 | 2003-07-05 | 원제 Первая любовь (1860년)

 

 

 

남겨진 생각들  

 

 고통을 수반하는 황홀함, 첫사랑

 첫, 이라는 수식어는 풋풋함과 황홀함을 동시에 선물한다. 그리고 고통 또한 수반한다. 그런데도 '첫'이 아름답고 아련한 것은, 지나온 시간 속에서 어떤 기억보다도 강렬한 추억과 잔상으로 남기 때문이다. <첫사랑>이라는 작품이 주인공 '블라지미르'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나이 열여섯, '청춘의 용솟음치는 삶의 기쁨이 싹트기 시작할 때 (13쪽)' 한 여자를 만났다. 운명이었던 것 같았다. 연상의 여인인 '지나이다'는 자신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고, 그의 불 끓는 열정을 장난으로 되받아칠 만큼 당돌한 여자였다. 그의 사랑은 마치 복종이었다. 사랑에 빠지면 온 우주가 나를 위해 돌아가는 것 같다고 했던가. 마치 그 꼴이었다. 그녀를 사랑할수록 그는 어린애처럼 작아졌다. 하지만 그 고통에도, 연모하는 감정은 점점 뜨거워져만 갔다.

 어린 사랑은 고통과 실패로 얼룩진다. 첫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청춘의 증표가 사라지는 것이기에, 그녀의 부재는 모든 것이 바스러져 버린 고통이다. 하지만 청춘이라는 시기는 되려 그 사랑을 배움의 기회로 바꿀, 당돌함을 선물하기도 한다. 어쩌면 뻔하디뻔한 사랑 이야기라 치부할 수 있는 이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건 서정적인 작가의 문체와 우수 어린 청춘의 고백이 가슴 깊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고통이다, 귀족의 보금자리

 

 인물의 역사를 설명하는 장대한 서술이 주를 이루면서, <첫사랑>에서 좋았던 서정적인 문장들은 가끔 톡 쏘는 양념처럼 튀어나온다. 그리고 소설 속 등장하는 '사랑'도 앞의 작품에서 등장한 '사랑'의 강렬함과 쌍벽을 이룰 만큼의 인상을 남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랑'이 자랐고, '작품'도 자랐다. <귀족의 보금자리>에서는 작가가 더 깊은 내면을 끌어낸 느낌이랄까. 당대 러시아의 귀족사회를 대변하는 한 가정을 등장시키며, (당시에는 가능했던) 친척 간의 사랑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진지한 대화 속 인간의 속성을 파악하게 하는 무거운 작품이다. 당대 러시아의 귀족사회를 통해 슬라브주의자와 서구주의자의 대립, 러시아라는 작가의 모국에 대한 애정과 이상을 진하게 풀어내며, '사랑' 또한 그 역사와 맞물려 성숙한 전개로 드러내고 있다. 현실과 현재의 감정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라브레츠키', 몸에 배어버린 관습과 윤리를 벗어던지지 못하는 순수하고 올곧은 인물 '리자'. 그들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는 다소 지겹게까지 여겨지는 러시아 특유의 장황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어내리게 하는 힘이 되었다.“젊어서 사랑을 하든 나이 들어서 사랑을 하든 고통은 수반되기 마련이다.” <첫사랑>의 풋풋하고도 강렬한 사랑 이야기를 반전시키는 듯한 작품의 배치가 묘하게 느껴진다.

 지배와 억압에 바스라져버린 사랑, 무무

 <무무>는 세 작품 중에 가장 담백하고 침착한 듯 보이나, 가장 슬픈 절규를 담고 있어 마지막까지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벙어리이자 귀머거리 농노 '게라심'과 그가 애정을 주었던 강아지 '무무'. 한 번 사랑에 실패한 그에게, 위로와 의지와 더 큰 사랑을 주었던 '무무'는 그의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농노제도'라는 비참한 현실,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여지주의 횡포로 인해, 그 사랑은 바스러져 버린다. 현실에 굴복하여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 이야기 중에서 <무무>는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큰 감정을 내보이고 있었던 작품이다. 지배와 억압에 대한 울분과 증오를 이렇듯 조용하고 담백하게 다룰 수 있을까. 가슴 아픈 사랑에 대처하는 가장 성숙한 모습이라고까지 여겨져, 오래도록 그 잔향이 깊게 남을 것만 같다.

 

나는 줄곧 겁에 질려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그리고 모든 것에 놀라움을 느끼면서 무엇인가에 대해 계속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치 아침놀이 물들었을 때 종루 주위를 나는 제비 떼처럼, 공상은 언제나 같은 환상의 주위를 빠르게 맴돌면서 장난치는 것이었다.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슬픔에 젖기도 하고, 어떤 때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노래처럼 경쾌한 시나 황혼의 아름다움이 자아낸 눈물과 우수를 통해, 청춘의 용솟음치는 삶의 기쁨이 마치 봄풀처럼 파릇차릇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13쪽, 첫사랑)

오, 청춘이여! 청춘이여! 그대는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다. 그대는 마치 우주의 온갖 보물을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심지어 우수도 그대에게는 위로가 되고, 슬픔조차도 그대에게는 잘 어울린다. 그대는 자신감이 넘쳐흐르며 대담무쌍하다. 그대는 "보아라, 사람들아! 나는 혼자서 살아간다."라고 말하지만, 그대의 좋은 시절도 흘러가고, 흔적도 없이 무수히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 그대의 모든 것은 태양 아래 밀랍처럼, 눈처럼 녹아 없어져 버린다……. 어쩌면 그대가 지닌 매력의 모든 비밀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능성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대의 힘을 다른 무엇을 위해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바람에 흩날려 보내는, 바로 그런 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120쪽, 첫사랑)

사방에서 정적이 그를 감싸고 있고, 태양은 잔잔한 푸른 하늘에서 조용히 떠가고, 구름도 조용히 흘러간다. 구름은 자기가 어디로, 왜 흘러가는지 알고 있는 듯싶다. 바로 이 시각에 지상의 다른 장소에서는 생활이 들끓고 사람들은 서두르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는데, 여기서는 똑같은 생활이 늪의 풀 위를 흐르는 물처럼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라브레츠키는 저녁때까지도 이 지나가는, 흘러가는 생활에 대한 관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지나간 날에 대한 애수는 그의 마음 속에서 봄날의 눈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이처럼 깊고 강렬하게 고향을 느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229쪽, 귀족의 보금자리)

내가 숭배하곤 했던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고, 불태우곤 했던 모든 것을 숭배했노라…….

그러고 나서 그는 말에 채찍질을 가하여 집까지 내달렸다. 말에서 내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감사의 미소를 짓고 마지막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용한 밤, 부드러운 밤이 언덕과 골짜기에 깃들어 있었다. 멀리 밤의 향기로운 심연에서, 하늘인지 땅인지 모를 그 어딘가에서 평온하고 부드러운 온기가 흘러나왔다. (267쪽, 귀족의 보금자리)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모스크바에 데려올 때부터 길을 눈여겨보아 두었다. 여지주가 그를 데려온 시골에서 큰길까지는 약 25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그는 큰 길을 따라 굳건하고 용감하게, 절망적이면서도 기쁜 단호한 마음으로 걸어갔다. 그는 가슴을 활짝 펴고, 두 눈으로 열심히 똑바로 앞을 응시하며 계속 걸었다. 그는 늙은 어머니가 고향에서 자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타향의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방황한 자기를 어머니가 고향 집으로 부르기라도 하듯이 서둘러 걸어갔다……. 이제 막 시작된 여름밤은 고요하고 따스했다. 태양이 지는 쪽에서는 아직도 하얀 하늘 언저리가 사라져 가는 하루의 마지막 반사광으로 엷은 홍조를 띠고 있었고, 그 반대쪽에서는 푸른 잿빛 어스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쪽에서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수백 마리의 메추리들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빙빙 날고 있었고, 흰눈썹뜸부기들이 앞 다투어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 (440쪽, 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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