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 씨
다비드 넬로 지음, 최이슬기 옮김 / 김영사on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책을 읽고 나서

 

 어느 날 '네, 아니오'를 사용하지 않는 언어적 금기를 정해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계적인 업무 속에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외치는 바틀비의 모습도 어쩌면 자신만의 (의지에 따른 게 아닐지라도) 법칙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틴 씨'는 달랐다. '바틀비'가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고' 선언할 때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고 절망과 우울함이 가득했다면, '루틴 씨'의 일상이 아무리 지루하다 하더라도 행복을 찾을만한 소지가 있었다. 그에게는 자신을 걱정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가 갑자기 이상한 법칙을 정했느냐 하면, 단순히 '일상을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그의 직업은 호텔리어, 한순간 몰아쳤다가 계절이 바뀌면 떠나는 여행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기가 부지기수였다. 반복되는 일상과 추워진 날씨는 그에게 "이유도 모른 채 갑자기 무언가가 삶을 슬프게 만들고 있다"고 느끼게 했다. 우리에게 어느 순간 우울함과 무기력증이 찾아오는 것처럼, '루틴 씨'의 마음도 그러했다. 어쨌든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로 그는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만의 지침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절대로 '응'이나 '네'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겠다. '맞다', '그래', '오케이' 같은 '긍정'에 해당하는 대체어도 절대로 쓰지 않겠다.

맞는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겠다. (25쪽) 

 

 그리고 이 법칙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발틱 해에 1천 크로나(한화 15만 원 가량) 세 장을 던져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이 우스꽝 스러운 언어적 금기는 어느 순간 하나씩 하나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루틴 씨'는 '아니오'와 '나'라는 일인칭을 전혀 말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어딘지 모르게 장난스럽지만 제법 진지한 그의 도전은 주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결국엔 '행복'에 대해 시사하고 있다. 누구나 한 번쯤 자신만의 남다른 철학 또는 규칙을 정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린 날 걷던 보도블록의 한 색깔을 정해서 밟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장난부터, 오늘부터 다이어트를 위해 작은 접시에 먹겠다는 작심삼일의 포부와 책장 속의 책을 진열하는 자신만의 방식까지……. 그 모든 것들은 사소해 보였지만, 어쩌면 우리에게 정해진 기로를 비트는 작은 표지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난이 너무 심해서는 안 되겠지!) 그 기로는 직진으로 갈 수도 있고, 좌회전, 우회전할 수도 있으며, 어쩌면 뜻밖의 상황으로 유턴해서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게 할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일상에 허덕이는 현대인들은 바쁜 시간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으려 애쓰며 살아간다. 주말을 이용해 데이트하고, 친구와 정기적으로 만나 스트레스를 풀고, 이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자신만의 취미를 생성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일상탈출을 위한 시도지만,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조금 더 비틀어보는 것은 어떨까? '매주 월요일에는 빨간 구두를 신는다', '매일 11시 55분에 향초를 켠다'와 같은 엉뚱한 법칙으로 일상의 반전을 시도해보자. 중요한 건 두려워하지 말 것, 그리고 진지하게 수행할 것. '루틴 씨'처럼 말이다.

 

 

 

 

 

Written by. 리니

스페인 소설/ 중남미 문학/ 청소년 소설/ 언어적 금기/ 독특한 소설 

소장하고 있는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루틴 씨는 시간 날 때마다 단어를 가지고 놀거나 말장난을 하거나 쌍둥이에게 농담하는 것을 좋아했다. 젊었을 때에는 `말을 먹어버린 남자`라는 제목의 연극 대본을 한 편 쓴 적도 있었다. 어쩌면 바로 그 대본에 대한 추억이 그의 삶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어 넣은 것인지도 모른다. 루틴 씨는 지침서를 꺼내어 아래에 추가로 적어 내려갔다.

지금 이 순간부터 절대로 `응`이나 `네`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겠다. `맞아`, `그래`, `오케이` 같은 `긍정`에 해당하는 대체어도 절대로 쓰지 않겠다. 맞는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겠다.

그는 이거면 그의 일상에 새롭고 흥미로운 상황이 생길 거라고 스스로를 격려했다. (25쪽)

이런 모든 도전에도 루틴 씨는 여전히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아니, 자신의 삶이 그렇게 많이 바뀌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얼굴을 보고, 같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루틴 씨에게는 새로운 삶을 위한 지침서에 넣을, 더 대담하고 새로운 방안이 필요했다. 루틴 씨는 침대에서 살그머니 일어나 다시 책상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한 계획을 하나 더 추가한 후, 루틴 씨는 침대에 들어와 곧 단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날 밤 그는 꿈에서 `응`이라고 세 번이나 말하고 무려 구천 크로나를 잃어버렸다. 그건 악몽에 가까웠다. (32쪽)


"아빠, 잘 하세요, 네? 우리가 지켜보고 있을게요." 토르가 말했다.

"무엇보다 이상한 말은 하지 마세요, 안 그러면 아빠를 정신병원에 가둘지도 몰라요." 마그나르가 충고했다.

"페트루스는 최선을 다할 거야." 루틴 씨는 쌍둥이에게 대답하며 어쩌면 마그나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그는 빈 맥주병에 삼천 크로나를 넣어서 발틱 해에 던져야 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걸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는 인생 전부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루틴 씨는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었기에, 그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가겠다고 약속한 이상 그는 꼭 그렇게 해야만 했다. (87쪽)

"누가 저 병을 발견할까요?" 마그나르가 말을 꺼냈다.

"누가 되었든 얼마나 놀랄지 상상이 가요?" 토르가 말했다.

"어쩌면 돈이 든 병을 주운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이 시작될 수도 있겠지." 루틴 씨가 말했다.

"그게 좋은 일일까요, 나쁜 일일까요?" 사스키아가 남편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사스키아.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요. 누구에게든 약간의 운은 언제나 필요한 거니까……."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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