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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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나서

 

 바다는 아름다우며 혹독하다. 하지만 채 자라지도 않은 티끌만 한 물고기에게 바다는 아름다움보다 혹독함이 훨씬 더 앞서는 곳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포식자와 어두컴컴한 심해 속 장애물들, 홀로 그 세상을 이겨내야만 하는 나약한 물고기의 표류는 외롭고 처량하다. 하지만 그 어린 물고기는 단순하기에 용감하다.

 

 

 라일라,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작은 흑인 소녀가 등장한다. "예닐곱 살 무렵에 나는 유괴당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글은 첫판부터 그녀에게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도록 한다. 그녀는 널따란 세상의 티끌 같은 손재지만, 그 작은 존재에게도 세상의 풍파는 빗겨가지 않는다. 아니, 빗겨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세차게 분다.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밤에 팔려왔기 때문에 지어진 '라일라(밤)'라는 이름밖에 없다. 처음으로 팔려간 '랄라 아스마'의 집에서는 사랑과 고통을 동시에 배운다. 버팀목이 되었던 엄마이자 보호자, '랄라 아스마'가 죽고 난 뒤, 그녀는 다시 거리로 나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화려한 거리의 여자들이 사는 여인숙에 들어간 라일라, 그녀에게 몸을 파는 여자들은 수치스럽거나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자신을 다른 의미로 봐준 '공주님'들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시기의 삶은 라일라에게 절제나 규율 따위는 없는 '욕망만을 따르는' 성향을 선물한다.

 

 

 어떤 고난도 겪을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는 어린 그녀는 주체적이진 못하다. 상황들이, 또다른 공격이, 그녀가 선택할 새도 없이 몰아치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오로지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서다. 치이고 또 치이면서, 걸어가고 헤엄치는 다른 사람들에게 밀리면서 그 작은 소녀는 여러 세상을 돈다. 감금과 폭력, 욕망 어린 남자들의 추파,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거대한 문명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공격의 대상이 되고, 이따금 그에게 손을 내밀어 도와주는 행운을 발견하기도 한다. 인생의 굴곡이 있다면 출발점과 정상을 가로지를 '라일라'의 생은 한마디로 지옥이다. 지옥에서 달아나려고 하는 그녀의 몸부림은 안쓰럽다. 어떤 것에도 그녀의 선택은 없다. 다른 사람이 손길과 상황이 만들어낸 그녀의 삶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렇기에 그녀가 꿈꾸는 행복은 자유, 구속되지 않는 삶이다.

 

 

 정체성과 자유를 향한 갈망은 라일라에게 자칫하면 좌절할 수 있는 어두운 상황에도 한 걸음을 떼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고난과 역경들이 어디에서 왔든, 누군가에게는 넘을 수 없는 언덕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뛰어넘을 수 있는 무릎만치 자그마한 돌덩이가 되는데 라일라의 경우, 언덕이다. 하지만 넘을 수는 있었다. 그녀는 그 언덕에 깊은 구멍을 내가며 올라가고 내려온다. 그 과정은 생의 바깥에 서 있는 나도 참을 수 없게 고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언덕을 넘어간다.

 

 

세상은 조용했다. 이제 두 귀가 모두 먼 것 같았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복도 끝에 있던 화장실에서 토했던 것 같다. 그리고 소리를 질러댔던 것 같다. 철문을 열고 터널 같은 통로 안에서 건물 꼭대기까지 울리도록 울부짖었다.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 환풍기의 모터가 하나씩 가동되면서 비행기의 진동음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 소리가 모든 소음을 덮어버렸다. 나는 시몬을 생각했다. 그녀를 보고 싶었고, 그녀가 음악의 한 소절을 반복하여 들려주는 동안 그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날 밤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194쪽) 

 

 

 역경이 있으면 행운도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역경이 있으면 얻는 것은 있다고 말할 순 있을 것 같다. 라일라의 숙원이자, 행복한 삶에 대한 물음이었던 것을 스스로 찾는 순간, 그리고 삶의 근원인 고향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녀는 빛나는 물고기가 된다. 여전히 작디작은 물고기지만 어른이 되었다. 그녀에겐 또다시 역경이 징검다리처럼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겨낼 것이다.

 

 

 작은 존재라도 강하게 빛날 수 있는 특권은 그가 가진 '운'에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어두운 심해를 불빛 없이 나아갈 수 있는 끈질긴 용기, 그리고 그 불빛을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는 선택. 나는 이 소설의 끝을 믿고 싶다.

 

 

 

Written by. 리니

프랑스 소설/ 성장 소설/ 노벨 문학상/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소장하고 있는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나는 후리야에게 부탁했다. "내게도 일자리를 찾아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네게 어울리지 않아. 너는 다른 걸 해야 해. 학교에 가야지." 그녀는 내게 프랑스어와 에스파냐어, 영어로 된 책과 공책을 사주었다. 타가디르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 "너는 우리처럼 돼서는 안 돼. 변호사나 의사 같은 뭔가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지. 우리 같은 허드렛일이나 해서는 안 된단 말이야." 나는 그녀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하튼 내가 누군가와 결혼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처음이었다. 내게서 남편을 위해 부엌일이나 하는, 그저 하찮은 하녀와도 같은 존재가 아닌 다른 면을 보아준 사람은 그들이 처음이었다.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이 벅찼다. 그녀들은 진실로 나의 착한 공주님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껴안았다. (72쪽)


"아무래도 미성년자인 것 같아. 집에 데려다주는 편이 낫겠어." 그가 여기저기에 전화를 거는 것 같더니 마침내 하킴과 연결이 되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자블로 거리에 있는 차고의 주소를 알아냈다. 그때 나는 세상이란 참으로 좁아서 실만 제대로 끌어당기면 모든 것이 끌려 온다는 것, 이를테면 누구든 어떤 일에 관련되면 서로 한 동아리를 이루게 되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게 되며, 노노와 나같이 그들과 무관한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몬의 남자 친구가 전화를 하는 동안 나는 내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몹시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이 담긴 시몬의 얼굴과 암소처럼 커다란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때 문득 나는 왜 그녀가 우리 둘이 서로 닮았으며 둘 다 자신의 육체를 가지지 못한 존재라고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뭔가 진정으로 원한 적이 없고 항상 타인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160쪽)

하킴은 나의 오빠였다. 나는 마리마였다. 나는 할아버지의 닳아서 반들반들한 손가락이 내 얼굴에 머물며 내 눈과 뺨과 입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을 느꼈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무엇인가가 내 속에서, 내 가슴속에서 부풀어올라 목구멍을 막았던 것이다. "그분은 내 할아버지였어. 정말이야.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더듬거렸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나는 숨이 막혔다. 하킴은 내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눈물이 아니라 분노였다. 나는 건물 안의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고 싶었고, 할아버지의 시야를 가로막았던 불투명한 하늘에 구멍을 뚫어버리고 싶었고, 유리창과 블라인드를 깨버리고 싶었고, 열차의 차량과 버스의 차창과 철로, 그리고 세네갈의 강줄기와 팔레메 강변의 얌바 마을에 닿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배를 부숴버리고 싶었다. (184쪽)

이곳 사람들, 아사카, 나킬라, 알루굼, 울레드 아이사, 울레드 힐랄의 사람들, 그들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서로 싸워 부상을 입고 사상자도 생긴다. 여인네들은 운다. 아이들은 사라진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우리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곳이다. 이제 나는 확신한다. 하늘의 정점에서 쏟아져내리는 햇살에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보이고, 거리는 텅 비어 있다. 햇살에 눈이 부셔 눈물이 고인다. 뜨거운 바람이 벽을 타고 먼지를 날린다. 바람과 햇살을 견뎌내기 위해 나는 네모난 커다란 천을 사서 이곳 여인들처럼 온몸을 감싸고 틈을 만들어 눈만 내놓았다. (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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