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 - 진짜 여행에 대한 인문학의 생각
정지우 지음 / 우연의바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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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우 (지은이) | 우연의바다 | 2015-12-05

 

 

남겨진 생각들  

현실의 벽에 부딪혀, '과감히 떠날 용기'는 잃게 된 나에게, 여행의 가치를 묻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호기심과 새로운 경험에의 의지는 편안함 속에 묻혀 버렸고, 장소에 대한 갈망에는 두려움과 "언젠가는"이라는 말이 끼어든 지 오래다. 하지만 몇 번 되지 않은 나의 여행 중에 정말로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친 기억이 있다면, 대학 초년생 때 친구와 떠난 일주일의 국내여행이었다.

 

 처음으로 긴 여행을 떠나기로 했기에, 친구와 나는 떠나기 위한 계획을 '떠나는 기간'보다도 더 오랫동안 준비했고, 그만큼 기대와 두려움도 크게 부풀어 올랐다. 친구는 긴 여행의 경험이 많은 편이어서, 설렘이 어떤 설렘인지도 모르는 어리숙한 나를 이끌었고, 새로운 도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즐거웠다고 묻는다면 1초 만에 답할 수 있지만, 순탄했냐고 묻는다면 100%라고 답할 순 없다. 어쩔 수 없는 '여행지의 우연'이 항상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계획했던 장소가 없어져 버린 '우연', 생각했던 시간이 어긋나버린 '우연', 마냥 즐거울 거로 생각했던 걸음이 꽤 힘들게도 여겨졌던 '우연'. 그러나 그 우연들은 그것을 회상하는 지금도, 그 당시에도 호탕하게 웃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재미난 우연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랬다. 몇 년 후 새롭게 떠난 패키지여행에서 (나의 첫 해외여행이었다) 친구가 "그때처럼 즐거워 보이지 않아."라고 했던 이유는, 편한 여행의 행복감과는 또 다른, 우연으로 가득한 여행의 활력을 나의 첫 여행에서 듬뿍 받았기 때문이었다. 해 질 녘 노을이 지기 위해 올라갔던 산기슭의 공원에서 태풍을 만나 두려움에 떨면서도 (결국, 운 좋게 히치하이킹에 성공했지만) 소리 지르고 실실 웃음이 나왔던 것은 아마도 그 활력과 풋풋함 때문이리라.

 

 인문학자 정지우 작가는 이 책에서, 내가 느꼈던 활력과 즐거움을 보다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인문학적인 감성으로 풀어낸다. 떠나기를 선택하기부터 떠나고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여행 과정을 상세하게 말이다. 그가 말하기를,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것은 현실을 벗어나는 것이고. 벗어남을 통해 우리 인생 전체를 쥐고 흔들고 있는 어떤 추상적 존재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떠나는 사람에 따라 여행의 의도도 방식도 그에 대한 만족도도 다르지만, 작가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여행'은 여행지를 걷고 수많은 우연을 만나면서 자신의 마음속을 걷는 것이다. 갈 곳 없이 사라지고 있는 우리의 내면, 쓸모없는 몰입과 허영으로만 치부되는 내면에 대한 성찰, 그것을 통해 마치 '번뇌'처럼 내 삶과 마음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내 몸을 표백시키는 여행이 되고, '자기만의 삶'과 '이미 정해진 현실' 중간쯤에서 두 가지를 조율하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한다.

자유를 얻은 여행자는, 이제 '성숙한 여행자'가 된다. 여행을 통해 자유를 얻고, 자유를 통해 '현실에 적응할 힘'이 아니라, '현실에 맞설 힘'을 얻는 '삶의 혁명으로서의 여행'을 진정으로 즐기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작가는 『당신의 여행에게 묻습니다』라는 책에 녹여놓았다.

"여행은 현실 속에서 무뎌진 세상과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그 회복이란,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감격하며, 이 순간을 사랑하고, 또 눈물겹게 슬퍼하는 상태를 되찾는 것이다. 여행자는 그렇게 얻은 능력을 가지고 또 새로운 도시로 향한다. 그는 여행 속에서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게 여행은 삶이 되고, 삶은 여행이 된다"

 어느 날 우연히 읽게 되어 빠져들었던 『삶으로부터의 혁명』부터 『청춘인문학』, 『분노사회』,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인생의 지침을 얻었다. 정지우 작가의 글은 언제나 냉철하면서도 감성적으로 나의 마음을 강하게 죈다. 때로는 머뭇머뭇대면서, 혹여는 외면하고 있는 진정한 나 자신을, 그와 맞닿은 삶의 자세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건드리는 탓이다.

  

 

 

인간은 모순적이게도, 변덕스럽게도, 용납하고 싶지 않게도 자유와 안락이라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을 모두 원한다. 인류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성취하기 위해 역사를 발전시켜 왔지만, 현대 기술력의 궁극점인 도시조차도 그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사람은 도시의 안락에 파묻혔다가도, 도시를 떠나는 자유에 몸을 맡기고 싶어 한다. 반대로, 지나치게 자유에 노출되면 다시 돌아가 안락해지길 갈망한다.

세상은 인간의 모든 욕망과 충동을 어떻게든 충족시켜 주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 시대 여행의 유행 역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갈망인 `자유`에 대한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인간은 어쩌면 영원히 자유와 안락이라는 딜레마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23쪽)

여행의 묘미에는 분명 `우연`이 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낯선 땅을 돌아다니다 보면 불운의 사고든, 행운의 인연이든 어떤 만남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우연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여행에 뛰어드는 이들은 기꺼이 온갖 고생을 각오한다. 무슨 일이든 정해진 가이드라인을 벗어나면 그만큼의 고생이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우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들을 좋아하고 부러워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이 대체로 우연보다는 사회적으로 규정된 기획 속에 처음부터 끝까지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특별한 우연이 가득한 것이기보다는, 정해진 현실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고, 심각한 불운을 겪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그리 특별한 일이 없는 `안정된` 인생을 갈구한다.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길 바라며 하루하루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한편에는 이 영원히 틀지어진 인생 루트를 벗어나고 싶은 갈망도 있다.(47쪽)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신경 쓸 사람도 없던 유럽의 낯선 도시를 걷다가, 나는 `그런 나`란 씻은 듯 사라지고 걸음 그 자체가 되는 경험을 했다. 그 순간의 나를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나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걷고, 그저 보는 하나의 동물이나 생명체 덩어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 모든 걸 경험하고 있는 `또 다른 나`가 있었다. `그 나`는 걷고, 보고, 만나고, 경험하는 그 모든 것들을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보고 있었다. 내 안에 들어오는 모든 감각들을 끌어안고, 종합하며, 간직하는 그런 나, 어떻게 보면 내 인생 전체를 관장하는 그런 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91쪽)

여행에서 우리는 새롭게 표백된 자기 자신과 새로운 시간성을 발견한다. 나의 세계를 지배하는 건 나의 시간관과 장소성이었다는 것, 결국 내가 어떤 시간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내 삶도, 내가 느끼는 세계도, 나의 생각도 많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속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배우는 것은 이 반복적인 성실성에 적응함으로써 내 삶이 새로운 양식으로, 창조적이며 건강한 양식으로 올라설 수 있다는 사실이다. (162쪽)

여행자가 이별에 익숙해진다는 것이 이별에 무뎌진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여행의 끝에 다가갈수록, 여행자는 각 도시의 일몰에서, 도시를 떠나는 버스 밖의 노을에서 더 깊은 슬픔을 느낀다. 그는 자신에게 도래하는 감정의 깊이를 승인한다. 일상적 삶에서 너무 깊은 감정은 용납되지 않는다. 깊게 느끼게 되면, 삶은 감정에 의해 중단되고 우리가 현실에서 수행해야 할 일들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에서는, 특히 한 도시에서 모든 일정이 끝나고 그저 다음 도시로 실려 가는 일만 남은 상황에서는 그 깊이가 용인된다.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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