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한강 | 강영숙 | 권여선 | 김솔 | 김애란 | 손보미 | 이기호 | 정소현 | 조해진 | 황정은 | 문예중앙 | 2015-11-10

 

 

 

남겨진 생각들  

 

 여러 작가의 글이 모여있는,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은 오랜만이다. 그런데 작품집은 처음이다. 단편보다는 장편을, 작품집 보다는 한 작가의 단편집을 쭉 읽어내려가는 것을 선호하는 터라, 이번 책은 작품 하나하나 꼼꼼히 읽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다 싶었다. 하지만 수상작에 '한강', 이어지는 후보작들에 붙은 이름들을 보니 그동안 좋은 느낌으로 읽었던 작품의 주인들이어서, 꽤 흡족한 독서가 될 것 같기도 했다. 익숙한 작가의 이름이 많이 보이니 반갑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러 문학상에 반복해서 비슷한 이름이 보이니 '역시 또?' 하며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어쩌겠는가. 한국 문학을 이끌어가는 개성 넘치는, 쟁쟁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니. 그의 작품을 한 번에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리는 일일 수밖에.


 이렇게 오래 살아가는 것들 아래 있으면 더 그런 생각이 들어. 우리가 해치지만 않으면, 어쩌다 불이 나거나 벼락만 맞지 않으면 수백 년도 살 수 있는 것들 아래에서, 이렇게 짧게 꼬물꼬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다음 달, 다음 해, 아니, 오 분 뒤 일조차 우린 알지 못하잖아. 그렇게 시간에 갇혀서 서로 찌르고 찔리면서 꿈틀거리잖아. 그걸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가 어딘가 있다 해도, 그가 우릴 사랑할 것 같지 않아. 우리가 상처 난 벌레를 보듯 혐오하지 않을까? 무관심하지 않을까? 기껏해야 동정하지 않을까? (39쪽,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한강)

 

 

​ 의도했는지, 아니면 우연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딱 지금 읽을 수밖에 없는 제목을 가진, '한강' 작가의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은 '보이는' 독특한 소설이다. 한쪽은 사회에 의해 자행된, 차가운 현실을 그린다. 그리고 한쪽은 주인공이 쓰는 희곡을 생생하게 그린다. 전자인, 주인공의 현실은 지금의 바깥 기온처럼 차디차다. 죽은 지 3년이 지난 뒤에 찾아왔지만, 나에게 이렇게 찾아올 만큼 가까운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는 존재의 '선배'와의 대화 속에서 '나'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회사의 파업, 해고, 침묵, 누군가가 잃어버린 자존감, 그리고 죽음을……. 그 모든 것을 회상하면서 쓰는 '희곡'은 고요한 듯하지만, 날카로운 감정들이 뒤섞여 피를 내고 있다. "내가 그 고통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 무섭도록 생생해서" 더는 쓸 수가 없을 정도로. 그리고 그는 묻는다. 남겨진 자들이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평화를 말해야 하느냐고. '한강' 작가는 찢어질 듯 날 선 감정들을 스산하고 잠잠하게 글 속에 가둔다. 후끈한 열기로 가득한 방, 차디찬 바깥 공기가 들어올 틈 하나는 남겨 두고서. 그래서 더욱 쓸쓸하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뒤이어 차례대로 나온 9편의 최종후보작은, 각각의 개성이 돋보이는 좋은 작품들이었다. 기대했던 작가의 작품은 역시나 좋았고, 작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던 작가의 작품 중에서도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을 꼽아보자면 권여선, 손보미, 조해진 작가의 작품이었다. 자신과 불가촉의 관계였던 이모가 생을 정리하는 두렵고도 아득한 과정을 지켜보는 <이모 (권여선)>. 젊은 부부의 집에서 많은 일을 떠맡으면서도 단지 '임시'로만 머무는 <임시교사 (손보미)>, 폐쇄된 과거 속에 존재하는 사물은 덧없는 조각이라는, 슬픈 추억을 그린 <사물과의 작별 (조해진)>. 문장과 묵직한 사유를 주는 작품들로 인해, 이 작가들의 다른 작품들을 더욱 궁금해할 기회가 되었다.

​ 제 15회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10편의 작품들은, 수상작을 비롯하여 각각의 색채가 짙어 당연히 어떤 통일된 느낌이 들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아득한 거리, 혹은 무언가를 잃은 불안한 현실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프지만 마주 보아야 할, 그런 일들을 녹여놓은 그들의 목소리를 진심으로 듣느라, 페이지를 다 넘길 즈음에는 안도감과 후련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힘들었지만, 다시 읽고 싶은, 오래도록 품고 싶은 소설들이다.

 

 

 

담아둔 문장

 

그녀가 기대감에 가득 차서 돌게장의 껍데기 속에 모아놓은 노르스름한 알과 내장을 입에 넣었을 때였다. 누군가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속의 것을 꿀꺽 삼켰고, 거대한 압착기에 얼굴이 끼인 것처럼 이를 딱 부딪쳤고, 그 엄청난 악력에 혀끝이 짓씹혔다. 눈앞이 번쩍 하더니 모든 기억이 반지 모양의 작고 까만 원형 속으로 빨려들었다. 지독한 통증이었다.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혀끝을 만져보니 침과 함께 피가 묻어났다. 혀끝에 뜨겁고 얇은 쇳조각이 달라붙은 느낌이었다. (181쪽, 이모 - 권여선)
 
 
 아내는 연주를 끝낸 뒤 수 천 명의 기립박수를 받은 피아니스트마냥 울었다. 사람들이 던진 꽃에 싸인 채, 꽃에 파묻힌 채.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는 사람마냥 내가 받치고 선 벽지 아래서 흐느꼈다. 미색 바탕에 이름을 알 수 없는 흰 꽃이 촘촘하게 박힌 종이를 이고서였다. 그러자 그 꽃이 마치 누군가 아내 머리 위에 함부로 던져놓은 조화(弔花)처럼 보였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악의로 던져놓은 국화같았다. (247쪽, 입동 - 김애란)
 
 
 사는 건 그런 거지. 그녀는 생각했다. 아, 괜찮을 거야. 언젠가, 마치 끈 하나를 잡아당기면 엉킨 끈이 풀어지듯이 잘못된 일들이 고쳐질 거야. P부인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잠들기 위해 눈을 감는 건, 생각보다는 언제나 쉬운 일이었다. (280쪽, 임시교사 - 손보미)
 
 
 병원 문을 열고 나가면 실타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굴러갈 것이고, 실타래에서 풀려나간 실은 밟히고 쓸리고 상하면서 먼지가 되어갈 것이다. 친밀했던 사람, 아끼던 사물, 익숙한 냄새를 잃게 될 것이고 세상도 그 속도로 고모를 잊어갈 터였다. 어느 날은 거울 속 늙고 병든 여자를 보며 이유도 모른 채 뚝뚝 눈물을 흘리기도 하리라. 하나의 실존은 그렇게 작아지고 또 작아지면서 아무도 모르게 절연의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 누구의 배웅도 없이, 따뜻한 작별의 입맞춤과 헌사의 문장도 없이…… (379쪽, 사물과의 작별 - 조해진)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냥 하던 대로 했겠지. 말하자면 패턴 같은 것이겠지. 결정적일 때 한 발짝 비켜서는 인간은 그 다음 순간에도 비켜서고…… 가방을 움켜쥐는 인간은 가방을 움켜쥔다. 그것 같은 게 아니었을까. 결정적으로 그, 라는 인간이 되는 것. 땋던 방식대로 땋기. 늘 하던 가락대로 땋는 것.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피륙이 있고 그것의 무늬는 대개 이런 꼴로 짜이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직조해내는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 (407쪽, 웃는 남자 - 황정은)
 

Written by. 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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