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의 고래 모노동화 1
김경주 지음, 유지원 디자인 / 허밍버드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남겨진 생각들  

 

 아직 문자를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이 우리에게 동화를 읽어주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 입술을 따라가며 우리는 세계를 느꼈다. 조금 섭섭한 일이지만 이제 우리는 세계가 어른들의 입술로만 만들어진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안다. 동화는 어른들의 입술의 세계가 아니라 어른들의 입술로는 다시 들어가지 못하는 세계라는 것을. (248, 기획 의원의 말 _ 김경주) 

 

 정말로 아쉽고 섭섭한 일이지만, 아이들만이 볼 수 있는 세계는 분명 있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눈앞에 놓인 것들을 단지 호기심만으로 빛을 내는 물체인 양 바라보지요. 그리곤 어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들을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말하곤 해요. 자기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그리고 노래할 때, 저는 경탄 어린 눈으로 보게 됩니다. "저건 어린 애들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야." 하고 말이죠. 그러나 그 상상의 세계는 커가면서, 성장하며 많은 것을 보며 점점 현실로 바뀝니다. 세상을 배우고, 많은 것을 알아가는 것은 어쩌면 다른 쪽으로는 매우 슬픈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나무 위의 고래』를 읽고 어쩌면 '시인'은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세계를 유일하게 재현해낼 수 있는 '어른'이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그 순수함과 생각의 밀도는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죠.

 

 

 

 

 

 『나무 위의 고래』 에서는 나무 위에 사는 소녀가 등장해요. 쓰나미로 엄청난 파도가 밀려들어 마을의 모든 집이 잠겨버렸고, 보트 한 척이 나무에 걸려버렸죠. 그 보트 위에서 소녀는 일 년을 살았어요. 세상과 소녀를 이어주는 것은 오직 라디오 한 대지만, 갈매기와 방울새, 우편배달부, 낙하병이 간혹 찾아와 소녀의 말상대가 되어줍니다. 그들과의 대화와 소녀의 고백은 남다른 감수성으로 책을 꽉꽉 채우고 있어요. 소녀가 그리는 숲 속의 환상적인 그림들과 호기심 가득한 말들은 너무 예쁘고 슬퍼서 정말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의심할 만큼 모호하죠. 마치 꿈처럼 다가와요. 그가 정말로 나무 위에서 살고 있는지, 단순히 상상으로만 이루어진 세계인지 확신할 수도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어요. 따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 어린아이들의 눈으로 말이죠.

 

 그러나 이 책이 어른 동화인 이유는, 어딘가 비틀린 부분을 어른들만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나무 위에 올라온 동물들은 소녀의 외로움을 자연스럽게 품어주지만, 낙하병과 벌목꾼, 윤리선생님 같은 '사람'들은 소녀의 환상적인 세계에 가려진 비틀린 세계를 언뜻언뜻 보여줍니다. 전쟁과 죽음, 윤리와 교육의 아이러니, 차가운 세계…… 아이들은 흐릿하게만 알 수 있는, 두려움과 잔혹함을 그리고 있어요.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그림 속에 숨겨진 흑백의 차가운 환영들은 어른 동화로 만들어진 이 책의 또 다른 볼거리예요.

 

 

 

 젊은 감각의 시인 · 소설가들이 창작하는 ‘자기 고백적 동화’라는 테마로 출간된 '모노 동화'는 텍스트뿐만 아니라 디자인에도 꽤 많은 신경을 쓴 듯 보여요. 그래픽디자이너 유지원은 이 아름다운 텍스트를 시각화하여 페이지에 그 이미지를 잔잔히 흘려놓았어요. 형체를 알 수 없는 이미지의 조각들은, 실제로 맞춰보면 위의 그림 10배 크기의 고래가 된다고 해요. 감각적인 그림은 『나무 위의 고래』의 몽환적인 텍스트를 더욱 깊은 감성으로 읽도록 도와주고 있죠.

 

 나무 위에 사는 작고 어린 소녀의 눈으로 본 인생의 이치를 담은 '모노 동화'. 외로움에 사무치고 막막한 성인들에게 현실의 복잡함 속에서 보지 못한 인생의 이치를, 우리가 잃어버린 순수함과 감수성을 찾아줄 거예요.

 

 

 

 

 담아둔 문장

 

 

 "바다가 보고 싶으면 날 한번 꼭 안아 봐도 돼."

 "왜 그렇게 해야 하지?"

 "날 꼭 안고 있으면 내 따뜻한 아랫배에선 바다 냄새가 날 거야."

 "넌 외롭구나."

 "응. 조금."

 "사람은 외로워지면 금방 몸이 차가워진대."

 "내 아랫배는 바다에 내려 앉을 때에도 항상 따뜻하지."

 그렇게 해서 나는 바다 냄새가 그리울 때면 날아온 부리갈매기의 아랫배를 꼭 안게 되었죠. (32쪽)

 

 

 숲에서 혼자 자고 일어나는 기분은 처음엔 맑은 공기 때문에 상쾌하지만 금방 외로워지기도 해요. 나는 내가 있는 곳이 꿈속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중얼거리죠.

 "내가 왜 여기까지 왔을까? 어떻게 이곳으로 걸어왔지?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혹시 낯선 사람이 잠든 날 안아서 여기 내려놓은 건 아닐까? 마녀의 빨간 빗자루를 타고 온 걸까? 집시의 초록색 기타를 타고 온 걸까? 아니면 썩은 몽키바나나를 너무 먹었기 때문에 나쁜 꿈을 꾸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주변을 보면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있었어요. 비록 꿈이긴 하지만요. 그러면 문득 겁이 나기 시작해요.

 "겁이 나면 외로워지는 것인지, 외로워지면 겁이 나는 것인지 아직 난 모르겠어." (34쪽)

 

 

 "이런, 구두끈이 풀렸잖아."

 어둠은 아저씨 앞에 도착하자 허리를 구부리고 자신의 구두끈을 묶기 시작했어요.

 "아저씨를 데리고 갈 거예요?"

 전 어둠에게 물었어요.

 "그럴 생각이야. 보고 싶지 않거든 눈을 감으렴."

 "전 너무 슬퍼요. 당신은 슬프지 않나요?"

 "난 이 사람이 더 이상 슬프지 않도록 해 주려는 거야."

 "어디로 그를 데려가세요?"

 "가족에게."

 "크루아상을 먹으며 그를 기다리나요?" (108쪽)

 

 

 "윤리는 뭐에요?"

 "네가 나무에서 사는 일이 없도록 교육하는 일이야."

 "그런 전 윤리를 배우고 싶지 않아요."

 "두려움을 가져야 이 사회에 필요한 윤리 의식이 생기는 거야."

 "전 자연에서 겁을 배우는 게 즐거운데요."

 "두려움을 버리면 반윤리적으로 보일 수 있어."

 "너무 어려워요. 윤리 선생님들은 지금 모두 뭘 하세요?"

 "모두 전쟁터로 끌려갔다. 아이들이 왜 무기를 들어야 하는지 리포트를 쓰는 중이야." (186쪽)

 

 

 첫 번째 연필에선 해일이 쏟아졌어요. 전 무서워서 다른 연필을 집었어요. 엄마가 깎아 주신 연필을 골랐죠. 그 연필에선 햇볕이 쏟아졌어요. 전 겨울에 맞는 단어를 하나 골라 하얗게 굴려서 눈송이를 만들고 입김을 불어 넣어 주었죠. 생명을 만들고 싶었으니까요. 지금까지 나무 위에서 보았던 자연의 눈부신 슬픔과 아름다움을 눈송이에 담아 보려고 했어요. 그러자 차가운 단어들이 눈송이 속에서 따뜻하게 숨을 쉬었어요. 전 눈송이가 된 단어들을 세상 여기저기에 뿌리기 시작했어요. 지붕 위에도 교회의 종소리 속에도, 햇볕이 들지 않는 캄캄한 동굴 속에도 눈송이를 날렸죠.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에게 눈송이를 보냈어요. 눈송이는 미소를 지으며 바람에 가까운 노래처럼 날아갔어요. (220쪽)

  

 

Written by. 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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