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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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지은이) | 예담 | 2015-11-16 | 초판출간 1995년

 

 

 

 남겨진 생각들  

 

 

 악의 주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소설은 자칫 위험하게 보일 수 있다. 일기로 채워진 글은 마치 강력한 독처럼 스며들어 온다. 주인공 '임순관', 대필작가인 그는 삶을 써내는 사람이었다.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글은 자신이 주체가 아닌, 다른 이의 삶을 기록하는 글이었다. 한평생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이의 삶에 배어들 수밖에 없었던 그는 결국 '토해내듯이' 일기를 썼다. 일기 속에는 우울과 냉소, 자기 허무에 가득 찬 문장들이 주체할 수 없이 실려 있다. 그는 왜 썼을까. "우리는 누구나 남다른 채로 남과 같지 않은가?"라는 소설 속의 말처럼, 자신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주르륵 펼쳐놓았던 것일까?

 

 

Q : 조금도 후회가 없는가?

A : 내가 묻겠다. 당신이 당신의 집을 더럽히고 당신과 당신의 가족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쥐새끼들을 다섯 마리쯤 죽였다면 후회하겠는가? 당신이 후회하지 않는다면 나도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가 있다면, 더 많은 쥐새끼들을 처치하지 못한 것이다. (238쪽)  

 연쇄살인범이자 사형수인 '손철희'의 기억을 회상하고, 그의 삶 언저리에 들어가 대필을 준비하는 과정이 처음으로 펼쳐진다. 포동포동 살찐 광란의 쥐떼들, 그들을 바라보는 '손철희'의 기억은 의뭉스럽다. 주인공의 고객, '손철희'. 세상의 모든 쥐새끼를 벌했다는 착각에 빠져버린 반영웅의 싸이코는 그렇게 '임순관'의 내면으로 들어온다.

 

 

 '악'은 어디서 오는가? 부정한 세상과 사람들의 호들갑이 '악'을 만드는 것이라 단언하면, 그보다 위험한 말이 없을 것이다. 한 범죄자가 있다. 그의 마음속 악의가 어떻게 자라났느냐는 질문에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요"와 같은 대답은 황당하리만큼 비겁한 말이며, 그렇다고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가 순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악'은 어디서 오는가? 어떤 이유도 없이 무심코 찾아오는가? 인간이란 모두 순수하고 일부 사람들만이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가? 작가 이승우는 이야기를 통해 말한다. 인간에겐 누구에게나 '악'이라는 본성이 있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속 '악'이 활개를 치지는 않는다고. 대신에, 세월과 시간으로도 채울 수 없던 균열은 이러한 '악'을 더욱 쉽게 부풀어 올라 악마의 얼굴을 하고 변해버리게 한다고. 『독』은 이러한 추상적인 과정을 그리면서, '악'을 부풀게 만드는 환경을, 누군가의 균열을 더욱 넓히게 하는 잔인한 도구들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악마를 키우고 악마에게 손과 발을 주는 것은 이 세상의 공기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다'고 덧붙이는데, 자신의 삶에조차 고유성이 없던 주인공 '임순관'의 삶이 딱 그런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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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기장이자 고백록인 이 글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정체불명의 여자 '민초희'와의 시간들, 자신과 동일시하는 연쇄살인범 '신철희', 우연처럼 배달되온 '연쇄살인범의 화살'과 같은 존재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다듬어져 만들어진 형상인지,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환상적이며 망상인듯한 주인공의 일기는, 섬뜩하리만치 무섭게 꺼내놓은 그의 마음속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는 장치가 된다. 자신의 욕망과 행동에 관해 모순과 합리화로 일관하고 있는 그의 모습들을 되려 비판하면서, 잔뜩 차오른 소설의 위험수위를 살살 달래고 있는 것이다.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소재를 들인 『독』은 95년 『내 안에 또 누가 있나』로 초판 출간된 후, 인제야 연재할 때의 제 이름을 찾았다. 묵직한 관념들과 신화, 종교와 같은 이승우만의 문학 세계를 완전히 맛보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있지만, 힘 있고 강렬한 이승우의 서사와 문장이 살아있다. 그의 작품들은 그 무게가 육중할지라도 도전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함께 출간된 『에리직톤의 초상』도 곧 읽어볼 예정이다.

 

 

 

 담아둔 문장

 

 

 내가 타고 있는 것은 세월이다. 세월은 나의 의지를 묻는 일없이 정해진 길을 간다. 세월은 흐른다. 흐르는 것이 세월의 본질이다. 모든 것이 잠들어도 시간은 잠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멈춰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흐름이 시간의 본질이라는 말은 그런 뜻이다. 오늘의 시간은 어제로부터 흘러왔고, 내일의 시간은 오늘을 거쳐 흘러간다. 어제는 오늘 속으로 들어와 살고, 오늘은 내일 속으로 들어가 섞인다. 그 세월 안에서 아무리 발악을 해도 나의 의지는 세월 밖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세월에 제동을 거는 일 따위는 아예 불가능하다. 세월의 승객에게 필요하고 가능한 한 가지는 단지 버티는 것이다. 갈 때까지 가는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멈추면 같이 멈춰 서는 것이다. 그것이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25쪽)

 

 

 맹인이 본 것이 맹인에게 진실인 것처럼, 색맹이 본 것 또한 색맹에게는 진실이다. 개개인이 이 세계에 대해 느끼고 수용하고 응답하는 양식의 주관적인 요소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종종 시끄러워지고 헝클어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세계 내의 본질, 또는 이 세계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진실이 하나밖에 없다는 주장이야말로 전체적인 발상의 소산이다. 자기네들이 진리를 사유(私有)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행세하는 그런 종류의 위인들은 다른 쪽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너무 당연하고 너무 쉽게 파시스트가 된다. (…) 나는 이곳에 잘못 던져졌다. 이곳의 시간과 공기와 사물들과 사람들은 내 편이 아니다.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일체의 것들에 대해 단 한 번도 신뢰를 보내본 적이 없다. 그것은 물론 그 일체의 것들이 나에게 한 번도 신뢰를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쪽)

 

 

 "진실은 은밀한 거지요. 봐요, 저것이 인간의 본색이에요."

 누군가 내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인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돌린다. 바로 뒤에 민초희가 서 있다. 유리 벽 너머에 있던 그녀가 어느새 이쪽 방으로 건너와 있다. 그녀의 존재가 나에게 현실을 상기시킨다. 그녀는 내 뒤에 서서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유리 벽 너머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나는 저 사람들에게 본색을 드러낼 공간을 제공했어요. 이곳이 아주 은밀하고 세상의 눈으로부터 단절된 안전한 공간이라는 믿음이 저들로 하여금 가면을 벗게 한 거죠. 가면을 벗으면 민얼굴이 나오지요. 여러 개의 가면을 벗어야 민얼굴이 나오는 사람도 있긴 해요. 너나 할 것 없이 민얼굴은 혐오스럽지요. 누구도 민얼굴을 해가지고 세상에 나다닐 수 없어요. 그러니까 가면을 쓰지요. (…) 그런데 이곳은 세상이 아니거든요. 세상으로부터 완전하게 단절되어 있거든요. (…) 저것이 본색이에요. 본색은 혐오스럽고 치욕이고, 슬픈 거예요." (265쪽)

 

 

 차가 떠난다. 길은 꼬불꼬불하고 어둡다. 더 검고 어두운 물속으로 빠져 몸을 담그기 위해 자동차는 어둡고 꼬불꼬불한 길을 달려가는 것 같다. 우주에 가득한 어둠이 이 깊은 산속에서 딱정벌레만 한 택시를 포위하고 있다. 딱정벌레 한 마리가 필사적으로 몸을 내돌리며 어둠의 포위망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길은 있으나 어둠을 향해 열려 있다 ……. 그러나 우리가 누군데 감히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겠습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그것을 만든 자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토기장이가 같은 흙으로 귀하게 쓰일 그릇과 천하게 쓰일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습니까……? 계속해서 그 테이프가 틀어져 있었던가. 차 안의 굵고 낭랑한 남자 성우의 목소리가 차 밖의 어둠과 한판 싸움을 벌이고 있다. 어느 쪽이 이길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어느 쪽이 이기기를 바라는지도 잘 모르겠다. (294쪽)

 

 

 

 

Written by. 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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