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팽창 스토리 살롱 Story Salon 3
구보 미스미 지음, 권남희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남겨진 생각들 

 

 

 이건 분명 언급하기도 쉽지 않고,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은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 사랑이 향하는 곳으로 화살표를 그릴 수 있다면 분명 겹치고 겹쳐 어긋나 있을 것 같은 그런 이야기.


 스물아홉의 '미히로'는 사랑을 한다.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자라온 '게이스케'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불안하다. 섹스가 없기 때문이다. 밤마다 '미히로'는 생각한다. "저기, 나, 지금 욕정을 느낍니다만." 배란기만 되면 갑작스럽게 반복되는 상황과 몸의 변화에 '미히로'는 당혹스럽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머릿속에 맴도는 단어는 오래전 남자 때문에 집을 나가버린 엄마에게 붙은 '음란한 여자'라는 낯부끄러운 칭호다. 트라우마로 남은 그 단어는 이제 자신에게도 옮아있는 듯 아프다.


 그가 그냥 안아주기만 하면, 사랑받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모순이라 생각한다. 치밀어오른 감정과 몸의 변화를 추스를 수 없던 어느 날, 그는 '게이스케'의 동생이자 어릴 적 친구였던 '유타'의 집으로 달려간다. 순식간에 벌어진 격렬한 밤, 올라오는 감정들. 내 몸은 왜 그렇게 때가 될 때마다 날뛰는 것일까. 나는 그를 사랑하는 것일까, 그는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우리의 사랑은 잘 되고 있는 것일까.


  '미히로'의 고민을 시작으로 하여, 그와 엮인 사람들의 조심스러운 사랑들이 연작 소설 형식으로 등장한다. 사고방식이 달라 주저하는 사랑, 잔잔한 호감에서 시작되는 사랑, 의지하듯 무언가를 잊어버리듯 빠져드는 사랑……. 어린 시절을 함께 한 세 사람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드러나는 그들의 성질과 과거는, 지금 매달리고 있는 사랑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왜 그들이 서로 만나게 되었는지 파악하게 한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속 얕게 깔린 감정의 방해물들이 드러난다.


 성과 욕망, 불륜 (결혼하지 않았지만, 불륜은 불륜이니까) 등의 자극적인 소재가 중심인데도, 일본 소설의 잔잔한 감성을 끝까지 잡아내고 있는 소설 『밤의 팽창』은 분명 특별하다. 엇갈린 사랑을 그려내는 방식은 사랑의 모습만큼이나 다양하지만, 이 소설은 분명 다른 느낌이 든다. 사랑을 바라보는 각각의 생각들을 촘촘히, 어쩌면 무미건조할 정도로 담담하게 고백하는 모습은 먹먹하고 안쓰럽고, 그 모습을 표현하는 문장은 아름답다. 그들의 마음엔 공감할 수 없어도, 불쾌하게 바라볼 수 없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몸을, 멀어져 가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어른 아이'들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 찝찝하고 답답한 작품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음에도, 살짝살짝 가슴을 건드리며 녹이는 소설이다.


 

"…… 솔직히 말하면 좀처럼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아. …… 어릴 때부터 줄곧 함께 지내서 가족 같아."
게이스케가 띄엄띄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족 같아. 닌자 만화에 나오는 표창처럼 뾰족한 말이 내 가슴을 찔렀다. 그 말을 뱉으면 나는 여기서 한 걸음도 게이스케에게 다가갈 수 없다. 가족같이 느낀다는 사람과 섹스하길 바라는 내가 엄청나게 징그러운 인간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48쪽)

전단지를 든 오가사와라 씨의 목소리가 좁은 현관에 울렸다. 구두끈을 묶으면서 올려다보니 오가사와라 씨가 입고 있는 니트에서 나온 보슬보슬한 실 같은 것이 복도 조명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문을 닫았을 때 퍼뜩 떠올렸다. 포동포동 살찐 오가사와라 씨의 질감은 뭔가를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뭔지 몰라 답답했는데, 드디어 알았다. 오가사와라 씨는 담배 가게 마사코를 닮았다. (86쪽)

나는 언젠가, 아이 같은 얼굴로 잠든 이 사람과도 아픈 일이 있을 것 같은,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그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어 보고 싶어졌다. 내 머리에 뿌려진 씨앗은 퇴적층처럼 미히로와의 추억이 켜켜이 쌓인 내 마음속에서 딱딱한 껍데기를 깨고 작은 싹을 틔우기 시작했으니. 커튼을 걷자, 어린 시절, 설날에 보았던 것 같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보였다. (102쪽)

"그럼 왜 유산한 뒤에 후련한 얼굴이었던 거야, 너?"
엉겁결에 유타의 팔을 꼬집고 있던 손가락을 떼었다.
언덕길 커브를 천천히 올라오는 버스를 보았다. 차 안에는 불이 켜져 있지만, 어째서인지 아무도 태우지 않았다. 유타가 한 말이 긴 화살처럼 머리에서 발끝까지를 관통하고, 내 속에서 투두둑 하고 정체 모를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게이스케에게조차 보인 적 없는 거친 욕망과 감정이 유타 앞에서는 노골적으로 드러나 버린다. 작년 여름과 마찬가지다.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무서웠다. 말도 안 되는 유타의 말을 기쁘게 생각하는 자신에게 공포를 느꼈다. (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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