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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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나서

 

 한밤에 깨어있는 걸 좋아해요. 큰 판을 벌이지는 않죠. 조용한 집안에서 혼자, 하루의 시간 중에 가장 활발한 상태로 읽고 쓰는 게 일상이지만, 때로는 작은 일탈도 감행해요. 새벽 1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간식을 사러 나가는 거예요. 신호등의 불이 모두 주황불로 깜빡이는 새벽, 엄마 차를 빌려 끌고 나갔다 오는 거죠. 집에서 입던 추레한 옷, 혹은 잠옷에 외투만 걸친 채로 아무도 안 만나기를 바라며.

 

 바깥의 세상은 온통 조용해요. 꼭, 그 길가에는 누구도 없는 것처럼. 그러나 조금 올려다보니 죄다 불 꺼진 창문 사이에 밝게 켜진 집이 보여요. 그리고 차로 한 코너를 돌아 넓은 길가로 들어서면, 이전과는 다른 세계가 펼쳐지게 되죠. 반짝거리는 간판, 이보다 더 역동적일 수 없는 사람들의 움직임. 이 어둠 속에 누군가는 깨어있고, 고요함 속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는 그런 신기한 풍경인 거예요.

 

 『애프터 다크』, 어둠의 저편에는 갖가지 풍경이 있고, 하루키는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하루의 자정부터 아침까지의 시간을 촬영 카메라로 담고 있어요. 도시의 넓은 풍경을 광각으로 조명하다가, 세세하고도 아주 사실적으로 피사체를 쫓기 시작하죠. 그 프레임에 들어온 사람은 자매인 '마리'와 '에리'예요.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거리의 심야 식당 '데니스'에서 동생인 '마리'는 밤을 지새우고 있어요. 그녀의 공간 속에서는 수시로 사람들이 바뀌어 가며 말상대를 해주고, 어떤 사건으로 끌어들이기도 하고, 잔잔히 음악도 흐르죠. 그러나 언니인 '에리'는 방 안에서 잠을 자고 있어요. 동생의 말에 의하면 언니는 "오랫동안 잠을 자겠다"고 선포하고 침대에 누웠다고 했어요. 그리고 두 달째, 그녀는 분명 잠을 자고 있는데 어렴풋한 움직임을 보이며,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작가는 이 둘, 생동감 있는 '마리'의 시간과 멈춰있는 '듯'한 '에리'의 시간을 각각 다른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어요. 새벽에 나가면 한 코스 너머로 밝고 시끄러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과 같이, 그들의 시간도 비슷하죠. 공통적인 건 그들을 쫓고 있는 카메라는 마치 감시하듯 그녀들의 일분일초를 훑고 있다는 거예요. '마리'가 만난 새로운 인물들, 호텔 '알파빌', 누군가에게 폭행당한 창부, '다카하시'와의 은밀한 대화들은 어둠의 저편에서도 생동하고 있는 움직임을 포착해요. 그리고 '에리'의 방에서는 텔레비전을 통해 왠지 모르게 오싹한 세계를 그려내죠. 아주 철저하게 단절된 세계를 기계적으로 서술하고, 의식의 흐름을 딱딱하게 조각내어 표현하고 있어요.

 

 소설은 역시나 무엇인가를 결론 내거나 판단하지 않은 채, 새벽 흘러가는 시간처럼 그들을 조용히 따라다니고 있어요. 자매의 '밤'은 움직임도, 분위기도, 냄새도 확연하게 다르고, 하루키는 자매의 '밤'에 특별히 개입하지도 않아요. 대신에, 그녀들의 삶의 접점을,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접점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지요. 중반부부터 시작되는 '시라가와'라는 남자의 기계적인 일상, '마리'와 '고오로기'의 기억에 관한 대화, '에리'의 동창인 '다카하시'를 통해 그 접점을 하나씩, 하나씩 터치해가며 그려내요. 어쩌면 그 접점은 둘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죠. '다카하시', 혹은 그들의 부모님, 심야식당 '데니스'에 앉아 있는 누군가, 호텔 '알파빌'에 묵었던 사람의 것일 수도 있어요. 그렇게 이어지고 지나치는 삶은 제각각 다른 모습이며, 누군가의 밤 속에는 또 누군가의 순간이 깃들고, 누군가의 냄새가, 손짓이 깃들어 있어요. 그리고 때로는 그 접점이 어둠을 관통하며 '각성'할 수 있는 도구가 되죠.

 

 어둠을 관통하는 도구를 집는 법요? 그것은 순전히 자기 의지로, 라고 하루키는 말하는 듯해요. 두 자매를 감시하는 카메라의 렌즈, 그 경계는 어디를 바깥이고 어디를 안쪽으로 나누고 있을까요. 카메라가 그들을 찍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들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그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요. 항상 확실하게 호불호를 찍을 수 없는 하루키의 소설이지만, 한 편의 잔잔한 영화 같은 『애프터 다크』 는 제게 확실하게 와 닿은, 매력적인 작품으로 남았어요. 한 방울의 알코올도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왠지 모르게 알딸딸하고 희미한 새벽, '결론 없음'을 아무런 불평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에 읽기를 바랄게요.

 

 

 

Written by. 리니

일본 소설/ 하루키/ 『어둠의 저편』 개정판 ​

우리는 하나의 시점이 되어 그녀를 보고 있다. 어쩌면 훔쳐보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시점은 공중에 뜬 카메라가 되어 방 안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현재 카메라는 침대 바로 위에 위치하며 그녀의 잠든 얼굴을 포착하고 있다. 사람이 눈을 깜박이듯 간격을 두고 앵글이 바뀐다. 그녀의 잘생긴 조그만 입술은 한일자로 곧게 다물어져 있다. 언뜻 보면 숨을 쉬는 기척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목에서 이따금 어렴풋한, 아주 어렴풋한 움직임이 엿보인다. 호흡은 하는 것이다. 그녀는 베개에 머리를 얹고 천장을 올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눈꺼풀은 겨울철 단단하게 오므라진 꽃봉오리처럼 닫혀 있다. 잠은 깊다. (32쪽)

"프로 뮤지션이 될 거야?"

그는 고개를 내젓는다. "난 그런 재능은 없어. 음악을 하는 건 재미있지만, 그걸로 먹고 살 순 없어. 어떤 걸 잘하는 것하고 어떤 걸 정말로 크리에이트하는 것 사이엔 크나큰 차이가 있단 말이지. 난 트롬본을 꽤 잘 분다고 생각해. 칭찬해주는 사람도 있고, 칭찬받으면 물론 기뻐. 하지만 그뿐이거든. 그래서 밴드는 이달 말까지만 하고 음악에서 손을 뗄까 해."

"어떤 걸 정말로 크리에이트 한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야?"

"그러게…… 음악을 마음속 깊이 전달하는 걸로써 자기 몸도 물리적으로 어느 정도 슥 이동하고, 그와 동시에 듣는 사람의 몸도 물리적으로 슥 이동하는, 그런 공유적인 상태를 낳는 거야. 아마도." (112쪽)

이윽고 에리의 얼굴에 또다시 움직임이 나타난다. 뺨에 앉은 조그만 날벌레를 쫓듯 근육이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이어서 오른쪽 눈꺼풀이 몇 차례 바르르 떨린다. 사유의 물결이 일렁인다. 그녀의 어둑어둑한 의식 한구석에서, 한 작은 조각과 또 하나의 작은 조각이 말없이 호응해 파문을 그리듯 엮여간다. 우리는 그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단위가 형성된다. 이어서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단위와 그 단위가 엮여 자기 인식의 기본 시스템이 형성된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그녀는 한 발짝, 한 발짝 각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각성은 답답하리만큼 느리게 진행되지만, 역행은 없다. 시스템은 이따금 당혹감을 내비치면서도 조금씩조금씩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한 동작에서 다음 동작으로 이어지는 데 필요한 공백의 시간도 점차 단축된다. (131쪽)

"그전엔 평범한 회사원이었어. 고등학교 나와서 오사카에서 그래도 이름 있는 상사에 들어가서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유니폼 입고 일했어. 너랑 비슷한 나이일 때. 고베 지진이 일어났을 무렵 이야기야. 지금 생각하면 어쩐지 꿈같지만.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있었어. 아주 작은 계기가. 처음엔 별일 아닌 줄 알았어. 그런데 문득 정신이 들고 보니까 옴짝달싹 못할 상황에 이르렀더라고.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고. 그래서 직장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 "마리, 우리가 서 있는 지면은 말이지, 단단해 보이지만 조금만 무슨 일이 있으면 밑이 쑥 꺼지고 그래. 한번 꺼지면 그걸로 끝장이야. 두 번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해. 저 아래 어둑어둑한 세계에서 혼자 살아가는 수밖에 없어." (188쪽)

그녀는 말한다. "그래서 생각하는 건데, 인간은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사는 게 아닐까? 그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기억인지 아닌지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아. 그냥 연료야. 신문 광고지가 됐든, 철학책이 됐든, 야한 화보사진이 됐든,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 됐든, 불을 지필 때는 그냥 종이 쪼가리잖아? 불은 `오오 이건 칸트잖아`라든지 `이건 요미우리 신문 석간이군`이라든지 `가슴 끝내주네`라든지 생각하면서 타는 게 아니야. 불 입장에선 전부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해. 그거랑 같은 거야. 소중한 기억도, 별로 소중하지 않은 기억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억도, 전부 공평하게 그냥 연료." (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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