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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사자 1 ㅣ 블랙 로맨스 클럽
송주희 지음 / 황금가지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 책을 읽고 나서
익숙하지 않은 작가의 이름, 그리고 판타지 로맨스라는 장르. 이 책을 고를 때의 장애물이라면 내게는 바로 이런 것들일 것이다. 특히나 '판타지'는 내가 낯설게 느끼는 장르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보고 싶어진 이유는, 신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는 점과 색다른 로맨스를 지향하는 '블랙 로맨스 클럽'의 신작이라는 것이었다. 같은 로맨스도 색다르게 표현해내며, 탄탄한 구성이 뒷받침하고 있을 터. 가끔은 로맨스도 당길 때가 있으니, 한번 읽어나볼까 하고.
이렇게 펼쳐진 『안개의 사자』는 일단, 독특하고 새로웠다. 주인공은 무려 신들이다. (신들의 이야기라니, 호기심부터 인다) 작가는 가장 오래된 신화인 '수메르 신화'와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소설 속 세계를 구축했고, 안개와 얼음의 나라인 '셰올'에 군림하고 있는 여신 '헬'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재밌는 건 그녀의 성정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들의 아버지 '아누'에게 버림받은 '헬'은 흉한 외모를 가졌고 믿는 건 힘밖에 없었다. 아름다워지기 위하여 여신의 머리를 뜯고, 님프의 피를 짜고, 세이렌의 목을 뜯어 갈취했다. 그렇게 완벽한 '여신'이 된 헬은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잔혹한 여신의 등장은 로맨스 소설의 캐릭터로서는 무척이나 매력적이라 할 수 있는 동시에, 로맨스의 향방이 어떻게 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는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역시나 등장하게 되는 삼각관계, 아니 사각 관계 속에서 그 잔혹한 여신의 행동들은 역시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머물고 있었다. 독특해 보였지만, 그렇게 파격적이진 않다고 해야 할까? (로맨스가 돼야 하니까!) 하지만 그 사랑의 과정을 그려내는 작가의 솜씨는 아주 능수능란하다. 그녀와 비교하면 약자인 듯하지만, 왠지 모르게 말려들게 하는 인간 '아담', 그리고 시종일관 애정을 보내는 오빠 '카옐' 사이에서 방황하며 진정한 사랑을 찾는 과정이 다른 이야기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나타난다. 초반에 다소 가볍게 느껴지는 듯 했던 사랑은, 후반부로 갈수록 무겁고 복잡한 감정의 사랑으로 변화되는데, 인생을 송두리째 걸만한 절절한 사랑 이야기는 로맨스 소설의 면모를 톡톡히 보여준다. 로맨스 그 너머의 이야기들, 주인공이 정체성과 비밀을 찾는 과정에서도 소설은 슬픔과 공허, 집착, 갈등과 같은 이들의 감정들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판타지에 신화가 곁들여진 장르기 때문에, 신들의 싸움이나 생생하게 그려지는 환상적인 액션들은 또 다른 볼거리다. 친숙하지 않은 용어들이나 상상 속 풍경들이 양날의 검처럼 가독성을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꼼꼼히 읽는다면 색다른 세계를 느낄 수도 있겠다. 또한, 소설의 배경이 된 신화를 읽어본 독자라면 더욱 풍성한 재미를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만간 책장 속 묵혀 두었던 북유럽 신화를 읽어 뒤늦게라도 소설의 몇몇 장면들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한다.
Written by. 리니
한국 소설/ 판타지 로맨스, 신화/ 블랙로맨스 클럽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글입니다.
"제가 그렇다 말하면 어찌하실 셈입니까?"
"죽여 줄게."
간드러진 목소리로 헬이 서슴없이 제의했다. 어떻게든 이 인간 사내의 마음에 들고 싶었다. 그는 헬의 눈동자를 보고도 현혹되지 않았고, 그 자태에도, 체취에도 홀리지 않았다. 신들이 내린 축복 때문인지 아버지가 수를 쓴 건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헬에게 달갑지 않은 건 맞았다. 어쩌면 이제 막 태어났으니 욕정을 아예 모를 수도 있겠다. 헬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아담이 아연하며 웃는 채 다가오는 순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1권, 32쪽)
"이것만은 기억해 두렴, 아담. 나는 너에게 뭐든 해 줄 수 있어. 지금처럼 세계 사이를 여행할 수도 있고, 막대한 재물이나 오랜 젊음, 신과도 겨룰 수 있는 정도의 강한 힘 따위를 아낌없이 선물하는 것도 가능하지. 네가 원한다면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수고를 아끼지 않을 거야. 하지만 단 한 가지, 내가 줄 수 없는 게 있단다."
아담이 헬의 표정을 열심히 살폈다.
"그게 무엇이죠?"
"영원한 사랑. 그건 내가 누구에게도 바치지 못하는 유일한 것이야." (1권, 112쪽)
너는 잘못한 게 없다.…
이 모든 건 아버지 아누 때문이야.
그러니까 그 남자만 사라지면 너도 나아질 것이다.
모든 게 본디 있어야 할 자리에, 마땅한 모습으로…….
그렇다면 현재의 나는 그릇된 존재인가? 옳지 않은가? 카옐을 잊어버리고 아누가 빚은 이 육체 안에 있기에? 헬은 혼란스러웠다. 떨리는 입술을 이로 꾹 깨물고, 저도 모르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으나 이미 카옐의 언사는 비정하게 마음을 후벼파고 간 뒤였다. 단 한 마디로 난도질을 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이토록 지나치게, 또한 철저하게 갈구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아, 이것은 물론 나도 안다. 하지만 카옐의 말은 제 생각보다 공격적이었고, 꽤나 비틀려 있었다. 설마 싶었던 추측이 확신을 얻고 현실이 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애석하게도 아주 찰나였다. 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2권, 129쪽)
그를 미치도록 싫어하면서도,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우면서도 헬은 완강하게 그를 거부하지 못했다. 필요에 의해서도 있었고, 그가 주는 애정이 몹시도 지당하게 느껴졌기 때문도 있었다. 때때로 그의 손길에 기분 좋았던 적도 없지는 않았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엔 죽을 만큼, 생명을 다해 증오했었다. 그가 없으면 저도 사라질 것 같다는 우려 때문에 미치도록 불안해서. 그가 제 전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내치고, 손을 뻗고, 안아 달라 조르고, 나와 너에겐 서로밖에 없음을 만족할 때까지 확인하다가 다시 내치고, 거부하고 욕을 퍼붓고. 하루에도 수천 번씩 감정이 뒤틀리는 바람에 마음을 헤아리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그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과거의 기억을 엿본 지금까지도 격정적으로 치솟는 감정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2권, 1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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