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고 나서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거예요? (71쪽)   

 

 지금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당신도 나를 사랑하고 있는데, 이토록 사랑하게 한 그동안의 기억들을 떠올릴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함께 했던 경험, 차곡차곡 쌓인 감정들은 흐릿하게라도 기억이 나지 않고, 사랑해서 낳은 아이의 존재만 알뿐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과연 어떨까? 과거가 없다면, 사랑하는 감정 또한 식어버렸을지도 모르는데, 대체 우리 사랑은 어디서 온 걸까?

 

 

 『파묻힌 거인』 속의 노부부, 토끼굴 마을에 사는 그들은 언젠가부터 이런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아들의 이름을 알 수 없고 어디로 떠나버렸는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마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 여자는 어느 샌가부터 사라져버리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잊혀버렸다. 그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져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둘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같은 현상을 겪는 듯 보이지만, 아무도 그 의문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금기가 아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기억들, 그 속에 있었을 수많은 추억을 찾기 위하여, 액슬과 베어트리스 노부부는 모험을 떠난다. 당최 어디로 간 것인지 알 수 없을, 아들의 집을 향하여.

 

 

 고대 잉글랜드의 평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의 영상미는 훌륭하다. 노부부가 모험을 떠나는 길목에는 도깨비, 용, 황야, 뱃사공 같은 환상적인 풍경들이 그려지는데, 회색빛의 을씨년스러운 안개가 텍스트 전체에 걸쳐있는 듯 오묘한 느낌을 준다. 모험 길에 오른 그들이 만나는 전사들과 풍경들은 영화 『반지의 제왕』을 떠올리게도 하고, 신비스러운 뱃사공의 에피소드는 마치 신화 같기도 하다. 그 풍성한 볼거리들 속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가? 바로 '사랑'이다. 낯선 모험 속에서도 끈질기게 드러내는 '사랑'의 철학 속에는, 기억과 용서, 복수, 다양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망각이라는 슬픔, 기억의 소중함, 그리고 그 기억을 재구성하면서 받아들여야 할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또한,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유고슬라비아 해체나 르완다 대학살 등의 역사적 사건에서 이 소설의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는데,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작품은 또 다른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개인적인 취향과는 잘 맞지 않은 작품이었다. 신비스러운 배경과 계속해서 등장하는 의미심장한 대화들이 좋았지만, 무거운 주제와 낯선 풍경 탓인지 읽는 속도는 매우 더뎠다. 하지만 읽는 속도와는 별개로, 몽환적인 분위기와 마지막 장면의 여운이 마음속에 깊이 남아 쉽게 잊히지는 않는 작품이 될 것 같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려는, 서로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부부의 모험. 그들은 계속해서 함께, 사랑을 나누고 있을까. 언제까지나 그 사랑을 확신할 수 있을까? 

 

 

 

Written by. 리니

영미소설, 영국문학/ 기억과 망각/ 사랑과 용서에 관하여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위스턴 씨." 비어트리스가 끼어들었다. "내 남편 얼굴에서 뭘 찾고 있는 건가요? 이 기사님은 지금 이 순간까지 우리 모두에게 낯선 사람이었는데 왜 그런 걸 묻는 거죠?"

"용서해주세요, 부인. 이 고장은 제게 많은 기억들을 일깨웁니다. 하지만 기억들은 마치 가만히 못 있고 언제라도 바람 속으로 날아가버리는 참새 같아요. 남편분의 얼굴은 온종일 제게 뭔가 중요한 기억을 떠올려줄 것 같은 느낌을 주었고, 진실을 말하자면 두 분과 동행하겠다고 제안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습니다." (163쪽)

"제가 말씀드린 사람들은 잔인함의 끝을 체험했어요. (…) 이런 일이 곧 다가올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적들이 나중에 저지를 짓에 대한 대가를 먼저 치르는 며칠 동안의 포위 작전이 소중했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마땅히 복수를 해야 할 곳에서 하지 못하는 이들이 미리 복수의 맛을 보는 거지요. 그런 이유로 우리 색슨족 형제들이 이곳에 서서 환호하고 박수를 쳤을 것이라고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적들이 잔인하게 죽을수록 그들은 기뻤을 겁니다."

"믿을 수 없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그토록 깊이 증오할 수 있단 말이오?" (212쪽)

어둠 속에 누워 여전히 잠이 오기를 바라는 액슬은 조너스 신부 방에 있던 내내 자신이 왜 그렇게 이상할 만큼 아무 말이 없었는지 기억해내려고 했다. 뭔가 이유가 있었다. 비어트리스가 안개의 원인을 알고는 얼굴 가득 기쁜 표정을 띠며 그에게 소리쳤을 때에도 그는 아무 말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녀에게 손만 내밀었다. 그는 뭔가 강렬하고 이상한 감정의 고통에 휩싸여 있었고, 주변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단어가 여전히 또렷하게 귀에 들리는데도 그 자신은 거의 꿈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추운 강물 위에서 배를 타고 있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배에 서서 멀리 짙은 안개 속을 바라보면서, 언제든지 안개가 걷히고 그 사이로 저 앞 육지의 또렷한 모습이 보일 거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는 공포 비슷한 것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동시에 호기심 - 아니면 아주 강렬하고 어두운 어떤 느낌 - 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단호하게 속으로 말했다. "그게 무엇이든 내가 확인해볼 거야. 내 눈으로 볼 거야." (233쪽)

"뭐가 두려워요, 신부님? 오늘 액슬과 제가 각자 마음속으로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들여다보면 아무리 이 안개가 위험을 숨기고 있더라도 기억을 되찾는 길이 우리에게는 어떤 위험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이건 해피엔드로 끝나는 이야기예요. 그러니 이전까지 아무리 우여곡절이 많았더라도 두려워할 게 없다는 건, 어린아이라 해도 알 거예요. 액슬과 전 우리의 삶이 어떤 모습이었더라도 함께 기억할 거예요. 그건 우리에게 소중한 거니까요."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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