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름을 지나가다
조해진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책을 읽고 나서
팔꿈치가 찢어졌다. "아무리 꼬집어도 안 아프다"며 장난을 치던 주름진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딘가에 긁혀 찢어질 때도 아프지 않았다. 무심코 그곳을 보았더니 꽤 많은 피가 고여 있었다. 작은 상처라 민망했지만, 관절이 있는 부위라 병원에선 꿰매라고 했다. 그리고 엊그제, 실밥을 풀었다. 속살은 다 붙고, 몇 주 동안 붙이고 있던 반창고 덕택에 각질이 일었다. 각질이 떨어지고 가운데서 새 살이 돋아난다고 했다. 이제 신기하게 아문 살 위로 아직은 빨간 실 자국이 남아 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팔을 최대한 안쪽으로 돌려, 보기도 힘든 팔꿈치를 계속 쳐다보고 만져본다. "잘 붙었네."
상처가 아무는 사이, 여름이 반쯤은 지나갔다. 아직은 자국이 있어 부끄러운 그곳을 긴 소매로 가릴 수 있을 만큼의 날씨다. 아직은 기온이 제멋대로 오르락내리락 심술을 부리지만, 가을의 냄새를 감지할 수는 있다. 잠깐 산책을 하러 어젯밤에 같이 나갔던 강아지가 어느새 떨어진 낙엽에 몸을 부볐다. 가을이 온 것만 같다. 그토록 혹독한 열을 선물했던 여름이 지나가는 건 언제나 순식간이다. 언제 이만큼 건너왔을까.
『여름을 지나가다』는 지금 이 계절, 딱 펼쳐보기 좋은 책이다. 후끈한 오후와 차가운 바람이 부는 저녁, 여름과 가을을 모두 가진 하루의 계절이 소설과 참 많이 닮았다. 부동산 중개소에서 일하며 매물로 들어온 집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는 '민',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신분증을 주워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수'. 그들의 은신처는 폐업하기 직전의 가구점이다. 가구들의 익숙한 실루엣, 적정한 온도, 포근히 안아주는 그곳에 머문다. 낯선 공간이지만 '민'에게 위안이 되는 그곳, 아버지의 절망을 엿볼 수 있지만 '수'에게 그의 흔적을 전해주는 곳. 그리고 또 다른 청춘 '연주'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지만, 곧 일자리를 잃을 운명에 서 있다. 정처 없이 방황하는 그들, 뜨거운 여름을 지나는 청춘이다.
무슨 꿈을 꾸었니?
민은 속으로 물었다. 묻고 다시 물었다.
현실이 좀 덜 끔찍한 거, 맞니?
더웠다. 밤의 열기는 새벽까지 이어지려는 듯 좀처럼 식지 않았다. (148쪽)
작가는 그의 말마따나 '기차 같은' 삶들을 그린다. 생애와 생애가 이어져, 선로를 지나는 긴 기차처럼 그들의 흔적은 살포시 이어져 있다. 하는 일은 달라도, 비슷한 인생이다. 다른 이의 공간을 단 하루씩 빌려 사는 삶, 다른 이의 이름을 빌려 진짜 자신을 회피하며 사는 삶, 반복되는 알바로 생활을 이어가는 삶……. 뜨겁고 뜨거운 여름, 이들을 살아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생애 한 자락이라도 이어져 있다는 것, 타인의 고통을 보고 듣고 따뜻한 믹스커피를 나눠마실 수 있다는 것. 거듭 실패하고 넘어져 상처가 생겨도, 시원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온다면 쓰린 상처를 씻어내 줄 수 있다는 믿음이다.
호된 여름이 간다. 소설 속 이들의 찌뿌듯한 삶이 생을 통과하는 우리의 모습과도 닮았다. 머리를 누르는 뜨거운 해의 무게감보다는 산뜻하고 약간은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적셔주길 바라는 나의 마음과도 이어진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계절이 온다면, 내 팔꿈치의 상처가 어느새 아문 것처럼 언젠가는 지워질 것이다. 아직 남은 빨간 자국은 언젠가 없어질 것이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또다시 여름이 온대도 그 계절을, 겪어낼 것이다.
Written by. 리니
한국소설/ 계절, 여름/ 청춘, 성장소설/ 문예중앙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목이 마르면 샘을 찾아가는 무구한 초식동물처럼 민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게 의심될 때마다 이곳으로 거울을 보러 왔다. 그럴 때 가구점의 화장대 거울은 다른 그 누구도 앗아가거나 침범하지 못하는, 오로지 민 혼자만 향유할 수 있는 무기질 조각이 되었다. 가구점의 잔잔한 어둠, 그 어둠 속에 느슨히 스며 있는 깊은 정적, 그리고 그 앞에 앉은 사람을 성실하게 복원하지 못하는 흐릿한 거울의 불명료함, 민이 좋아하는 건 그런 것들이었다. 흐릿한 거울 속에서 흐릿한 자신이 흐릿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 흐릿한 생애가 상상됐다. 가령 일정 기간 살다가 미련 없이 죽고 그 죽음에서 빠져 나온 뒤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다시 태어나는, 그러니까 일생이라는 개념으로는 규정될 수 없는 태어남과 죽음의 끊임없는 반복. 그런 식의 삶은 기차 같은 거라고 민은 생각했다. (9쪽)
그즈음 그도 터득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계획에도 없던 다른 종류의 삶으로 빨려 들어가는 허약한 지점들이 우리의 인생에는 생각보다 많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어쩌면 민보다 더 절박하게, 구체적으로. 그럼 이곳은 흐릿한 곳일까, 명료한 곳일까. 진짜 세계인가, 거짓으로 빚어진 허상인가. (50쪽)
쉭쉭 소리를 내며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가로수의 무성한 나뭇잎이 출렁였다. 세계의 농도가 묽어지는 게 느껴졌다. 묽어지면서 흐릿해지는 세계, 낯설지는 않았다. 눈 깜빡할 사이에 생애가 지나가는 곳, 죽는 건 또 다른 생애를 위한 준비에 불과하므로 불안할 것도 아플 것도 없는 세계, 생애와 생애는 기차 칸처럼 연결되어 있으니 손에 쥐고 있는 표를 잃어버린대도 상관없는 곳, 그런 세계를 지나가고 있는 거라고 민은 생각했다. 그러니 지금은 무서울 것도, 미안할 필요도 없었다. 방금 전 뇌성마비 청년의 애인은 죽었고 다시 중개사무소 보조원의 생애가 시작되었으므로, 전생의 죄책감과 기만적인 비애는 이번 생애에서는 무효가 되는 거니까. (116쪽)
은희 할머니의 천장을 고쳐주지 못했듯 동욱의 외로운 일상을 채워줄 수는 없다. 동욱의 휠체어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다시 중개사무소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며 민은 생각했다. 그와 함게 식탁을 차려 밥을 먹는다든지 느슨한 자세로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장면은 상상도 한 적이 없었다. 비가 새서 눅눅하게 젖어갈 수밖에 없는 건 낡은 천장만이 아니다. 삶에도 누수의 흔적은 남기 마련이고, 그 흔적은 좀처럼 복원되지 않는다. 아니, 절대로 복원될 수 없는 흔적도 있다. (13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