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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간이 아주 많아서 - #남미 #라틴아메리카 #직장때려친 #30대부부 #배낭여행
정다운 글, 박두산 사진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우리는 시간이 아주 많아서』 정다운, 박두산 / 중앙북스
직장 때려친 30대 부부의 '다정한' 남미 여행기
한동안 여행 에세이만 보면 눈이 번쩍 뜨이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호기심이 반쯤, 아니 80프로 정도는 떨어진 상태다. 여행 에세이를 읽는 이유 중 가장 많이들 얘기하는 대리만족이야 분명히 느껴지지만, 어떤 특정한 테마 - 이를테면, 음식이나 집, 자신만의 특별한 여행 모토 - 없이는 모두 다 비슷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이 책도 비슷한 느낌이어서 살짝 고민했지만, 끝내 받아보게 된 것은 그동안 만나보지 못했던 '남미' 여행에 국한된 에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요즘 남미 지역의 책을 부쩍 접하기도 해서인지 운 좋게 다가온, 오랜만의 여행에세이.
가장 먼저 『우리는 시간이 아주 많아서』라는 제목은 감성적인 여행 에세이 느낌이 물씬 풍기지만, 어쩌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위험한 제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시간이 아주 많아서'라는 말이 자칫 '우리는 그만큼 여유가 있어서'라고 비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롤로그 처음부터 이러한 글이 있었다.
결혼한 지 2년째 되던 해였고, 둘 다 30대 초반이었다. 나는 IT기업의 과장, 남편은 게임회사의 대리, 수도권 아파트에 살며 아침이면 마을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출근을 했고, 가끔 야근을 하지 않는 날이면 한께 장을 보고 저녁을 해먹었다. 주말에는 보통 밀린 잠을 잤다. 평범한 일상이었다. 별일이 없다면 그렇게 몇 년은 더 잘 지낼 것이었다. 오늘처럼 내일을 살고, 내일처럼 모레를 사는 일은 쉬웠으니까. 출근하는 남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걸 못 본 체할 수 있다면, 퇴근하는 그의 축 처진 어깨를 모른 척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대로 쭈욱, 지낼 수 있었다.
여느 직장인들처럼 그들은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고, 평범한 일상을 그대로 지나치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 수많은 이유, 그리고 가장 궁극적인 목표인 '행복'을 위해 둘 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들의 여행은 그동안의 바쁜 날들에 대한 보상이었고 오랜 꿈이었다. 그리고 물론, 6개월 뒤에는 다시 이전에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제한된 꿈이었다.
느낌이 좋은 곳에 머무르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그들의 여행은 참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유독 젊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을 만나 함께 여행길을 걷고, 고생하면서도 그곳의 에너지를 듬뿍 받아 힘을 내는 모습을 봐도 그렇고, 분명 부부의 여행인데도 여행길을 동행하는 친구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해서였다. 걸어서 넘는 '과테말라'와 '멕시코' 사이의 국경, 경이로운 사진들로만 구경했던 '우유니 사막', 위험한 지역이라 여겨졌지만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던 '콜롬비아'를 거치는 그들의 여행은 부러웠고, 왠지 모르게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것처럼 여겨졌다.
현실적인 것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오래된 카피가 떠오른다는 점이었다. 책 속의 여행은 장소와 기간은 달라도 많은 직장인(혹은 청춘)들이 잠시 멈춤 하는 여행을 하는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랄까. 그리고 비현실적인 것은, 어쩌면 모든 이들의 목표인 '행복'을 찾아 직장을 때려치웠던 그들의 용기였다.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 위해 당장 직장을 때려치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남미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들의 '잠시 멈춤'도 자유롭고 아름다웠다. 친구 같기도 하고 모든 것을 의지할 수 있는 부부의 모습과 책에서마저도 한 켠을 나눠주고 있는 ('그의 시선'이라는 페이지가 간혹 등장한다) 구성이 참 예뻤다. 책의 마지막, "한동안은 손이 닿는 곳에 배낭을 둘 생각이다"라는 말은 그들이 언젠가 또 여행을 떠날 거라는 계획으로 여운을 주고 있었다. 유독 특별하지는 않지만, 담백하고 다정하게 진심을 전하는 느낌이어서 읽는 동안 참 편안한 여행 에세이였다.
Written by. 리니
한국 에세이/ 여행 에세이/ 남미/ 배낭여행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쓴 서평입니다.
식사 중에 펼쳐진 여행 이야기. 20년간 아프리카며 아시아며 전 세계 구석구석을 여행하셨단다. `환갑 기념`으로 남아공에서 번지점프를 하셨던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입을 떡 벌리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6대륙을 넘나드는 그 길고 진한 여행 이야기보다 더 흥미로웠던 건, 그 말씀을 허세 없이 담담히 들려주신다는 거였다.
이 정도면 책을 여러 권 내고도 남았을 텐데, 이렇게 조용히 세상을 걷는 사람이 있었다. 긴 여정을 시작하려는 때에 이런 어르신을 만나다니.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났다`는 걸 무슨 훈장처럼 여기고 우쭐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던 우리에게 겸손한 여행을 하라는 신호가 아닌가 싶어, 우리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며 그분의 이야기를 새겨들었다. (23쪽)
오늘 하고 싶은 것이 오늘 할 일이 된다는 것,
어제 하지 못한 것이 오늘 할 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
내일 해도 되는 일을 굳이 오늘 미리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온전한 오늘의 의미에 익숙해지면서 비로소 여유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쉬는 법을 조금씩 알 수 있었다.
회사에 다닐 때는 시간의 단위가 복잡했다. 업무 다이어리는 1년의 시간을 분기로, 월로, 주로, 일로, 시간으로 쪼갰다. 단위가 정교해질수록 열심히 일하는 척할 수 있었다. 때론 너무 비대해진, 그래서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에 단위에 짓눌리기도 했다. 일일 업무보고, 주간계획 작성, 월간목표 수립, 분기별 성과보고, 연간계획 수립, 중장기 비전 설정까지. 모니터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시간을 위해 나의 하루는 완결된 단위로 기능할 수 없었다. (60쪽)
그런데 이상하다. 이 모든 부조리함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쿠바를, 아바나를 왠지 싫어할 수가 없었다. 좋아할 이유보다 싫어할 이유가 훨씬 많았지만 나는 의외의 부분에서 너그러워지곤 했다. 아바나에는 어제 걸었던 그 거리를 오늘 또 걷고, 다음 날 또 걷고 싶어지게 하는 힘이 있었다. 비록 삐끼에 지쳐 한 시간만에 되돌아오더라도, 또 기운이 나면 바로 나가고 싶어지는 그런 에너지 말이다. (121쪽)
`이러다 차가 기울어 벼랑으로 떨어질지도 몰라요!`
나는 그만 화가 나서 사람들에게 꽥 소리 지를 뻔했다. 간신히 참고 혼자 조용히 왼쪽 끝으로 옮겨 앉았다. 그때 오른쪽 창으로 몰려간 사람들이 본 것은, 무려 절벽 아래에 떨어져 있는 버스. 최근에 있었던 사고라고 했다. 그때부터 도서관이고 뭐고, 다시 돌아올 길이 걱정되어 사색이 되었다. 그런 길을 3시간 반 더 달렸다.
내 인생 가장 아슬아슬한 순간이 그들에게는 평범한 일상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그만 울 것 같아져 버렸다. 남편은 얼굴이 질려버린 나를 보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였지만 나는 점점 몸이 뜨거워졌다. 집에 가고 싶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집에 누워 있었으면. 내 방에는 가습기도 있고, 푹신한 침대도 있고, 빠른 인터넷도 있는데. (209쪽)
아주 가끔씩은 몇 년 혹은 몇십년째 배낭여행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에게 찾을 수 있는 어떤 공통점이라면 사진을 그다지 즐기지 않거나 SNS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 말하자면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애써 타인에게 전하려 하지 않고, 굳이 기록으로 남기려 하지 않고 그 여력으로 자신에게 보다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자기 확신이 몹시 부러울 때가 있다.
그런 장기 여행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자유분방함에 대한 동경도 동경이지만 세속적인 호기심도 떨칠 수가 없다. 대체 여행자금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떠나기 전에 돈을 많이 벌어둔 것일까, 부모님이 재벌인 것일까, 아니면 뭔가 다른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일까. 차마 물어볼 수 없는 몇 가지 질문들이 입가를 맴돈다. 요컨대, 두어 달 뒤에는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가 슬퍼질 때가 있다. (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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