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시작 오늘의 젊은 작가 6
서유미 지음 / 민음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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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의 시작』 서유미 / 민음사

 벚꽃피는 계절, 그리고 이별의 순간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은 이제 조금은 식상한 문장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듣기에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안 좋은 어감의 '끝'에 희망을 불어넣는 '시작'이라는 단어가, 둘이 상반된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참 잘 어울리기 때문이죠. 그리고 『끝의 시작』이라는 소설의 제목을 보고서도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을 저는 갖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식상하고 진부하기까지 한 '끝과 시작'을 어떻게 표현해낼까" 하는 느낌, 그리고 두 번째로 '그렇지만 오히려 독특할 수도 있겠다'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끝의 시작'을 삶에 대입해보면, 생각보다 그 상황들이 많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상실과 공허, 그리고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그림이 되겠지만, 책 속의 그림들은 생각보다 풍성하고, 다채롭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현실적인 그림들입니다. 딱히 '공감'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꼭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랄까요.

 

 어머니의 암 투병과 아내의 이혼 통보를 통해 '이별의 유예기간'을 가지고 있는 '무영'

 결혼생활의 무미건조함을 어린 남자와의 밀회로 달래려는 '무영'의 부인 '여진'

 '영무'가 일하는 우편취급국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가난한 청춘 '소정'

 

 

 오묘하게 얽혀있는 이들은 각기 다른 모습의 이별 (혹은 끝)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이별까지의 기간을 담아낸 장면들은 무척이나 헛헛한 기분입니다. 어머니의 암 선고와 아내의 이혼 통보가 오직 타이밍일 뿐 어차피 언젠가 찾아올 것이라는걸, 어린 남자와의 밀회가 그리 길지만은 않을 거라는걸, 일도 사랑도 지긋한 현실 속에서는 이상적으로 비치지만은 않을 거라는걸, 그들은 은연중에 실감하면서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한 삶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작가는 그 삶을 마주 보기 힘들 정도로 지독하거나 절망적으로 그려내고 있진 않습니다. 울컥하며 올라오는 이별의 순간도 잔잔한 물결로 찾아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그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사랑이 끝난 것에 대해, 이별의 이유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될수록 설명의 방식이 달라진다는 걸, 주관에서 객관으로 옮겨 간다는 걸 깨닫게 될 뿐이었다." (138p)

  이별의 순간과 함께한 '벚꽃 피는 계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흘러가 버립니다. 마치, 나무에 화려하게 매달려 있던 꽃잎들이 어느 순간 모두 바닥에 떨어져 흙과 물과 섞여서 원래 꽃잎인지도 모를 만큼 흩어져 버리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어느 순간 반짝이며 빛나는 뜨거운 태양이 찾아오고, 즐거운 계절이 찾아옵니다. 거짓말처럼 시간이 흘러서, 어느새 새로운 계절의 시작으로 들어섭니다. 화려하고 향긋했던 벚꽃의 잔상은 이미 남아있어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조금씩 건들긴 하지만, "슬픈 건 슬퍼하고 잊을 건 잊고 좋은 일엔 기뻐하자 (172p)"라는 소설 속 말처럼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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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지원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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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 일도 잘 이겨 냈잖아. 앞으로 잘 지내다 보면......"

"내가 좀 살고 싶어서 그래." 여진의 말투는 단호했다. 입가에 우유 거품이 조금 묻어 있었다.

영무에겐 이혼 자체보다 타이밍이 더 가혹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마음 졸이며 지냈다. 혼자서 엄마의 발병과 상태의 심각성을 감당해야 했고 항암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결정도 내려야 했다. 버거운 시간이었고 여진에게 위로 받고 싶은 마음도 얼마쯤 있었다. 위로나 격려로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아는데도 그랬다. 오래전, 영무가 모르던 어느 순간부터 그 밤을 향해 한쪽에서는 폐암이, 다른 쪽에서는 이혼이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병원에 먼저 왔기 때문에 폐암을 일찍 만나고 오늘에서야 이혼을 만나게 된 것뿐이다. 시간을 늦출 수는 있지만 어느 것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그를 기운 빠지게 했다. (28p)

"그동안 수고한 인턴들에게 박수 좀 쳐 주자고."

팀장이 주머니에 찌르고 있던 손을 꺼내 박수를 치자 직원들이 일제히 수고했어요, 하며 박수를 쳤다. 누군가는 휘파람까지 불며 환호했다. 박수 소리가 예상보다 커서 기분이 이상했다. 소정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눈을 여러 번 깜박거렸다. 3개월 동안 같이 지냈는데 앞으로 못 본다는 게 슬픈 게 아니라 마지막 날까지 옮겨 갈 곳을 정하지 못했다는 게 서글펐다. 월말이긴 하지만 모두가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1월에 백수가 되는 건 추운 일이었다. (37p)

샤워 후 몸에 밴 냄새를 모두 지우고 나면 엄마는 물기를 말린 뒤 플라스틱으로 된 커다란 헤어롤을 머리 전체에 말았다. "어때? 괜찮아 보여?"

엄마가 물을 때마다 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헤어롤과 붉은 립스틱, 손톱과 발톱에 바르는 진한 색 매니큐어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해서 살아갈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좀 더 진하고 붉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예뻐요." 그러면 엄마는 흡족해하며 웃었다. 살아 있고 살아간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몸에 바른 색은 지워질 것이고 다시 냄새가 날 테지만 그것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다른 색으로 칠하고 새로운 향수를 뿌린다. 그게 견디는 방법인지 그렇게 하는 것이 견디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살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영무는 거울 앞에 앉아 있는 엄마를 이따금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거대한 벽 앞에서 엄마는 어떻게 우회했을까. 궁금했지만 한 번도 묻지 못했다. (103p)

4시에 여진은 냉장고에서 와인을 꺼내 개봉했고 살짝 눅눅해진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올해도 꽃구경은 글렀구나 싶었다. 석현이 술이 깨지 않은 상태에서 던진 말일 가능성이 컸지만 그 순간에는 꽃을 보러 가자는 말을 의심하지 않았고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밤의 연인인 그들에게 한낮의 데이트라는 건 확실히 꿈같은 면이 있었다. 사실 이 만남 자체가,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만나 밤을 같이 보낸다는 것 자체가 봄날 같고 꽃놀이처럼 황홀했다. 꽃이란 영원하지도 않고 영원할 수도 없고 그 아름다움이 금세 사라지기 때문에 매혹적이고 감탄이 나오는 것이다. 이 만남과 이 시절도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자 꽃을 보지 못하는 게, 꽃잎이 떨어지는 게 견딜 만해졌다. 여진은 통 안에 담긴 샌드위치를 천천히 먹어 치웠다. 이 너그러움이 취기와 포만감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길 바랐다. (15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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