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호밀밭의 파수꾼』 J.D 샐린저 / 민음사

 콜필드의 '특별한 타락'

 

 

 

 내 청소년기는 아주 흐리멍덩했다. 시간의 한 부분이 잘린 것처럼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 시절이 있었고, 우스운 얘깃거리는 많지만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은 시절도 있었다. 모두가 한 번쯤은 일탈을 경험하는 사춘기도 심하게 타지 않았다. 그저 조용한 아이는 아니었고 그냥 보통 학생 그 근처를 배회하며 재밌게 놀기도 하고, 아주 작은 장난과 실수도 쳐가며 살아왔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밋밋한 청소년기였다. 물론, 세상에 대해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어른이 되고 싶다'는 발칙한 상상마저 들지 않았고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조금 더 날카롭고, 적극적이었다면?" 하는 궁금증도 든다. 청소년기여서 할 수 있는 이유 없는 반항적 심리를 알고나 있었을까. (물론 반항이란 각종 막돼먹은 행동들과 일탈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가장 날카롭게 여겨지는 아이들의 순수한 일침 같은 것을 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순수한 어린아이의 얼굴을 가지고 이것저것 거르고 가면을 쓰고 있었던 나는, 속은 순수하지 못한 채 그저 어른들처럼 행세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그때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더라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사실상 모든 청소년에게 권장도서로 한 번씩은 언급되곤 하는 이 책을 그때 만났더라도, 이해는 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 읽었던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느낌이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어(소설 속 영어) 이외에는 온통 낙제점이라 퇴학을 당하고, 학교란 쓸데없는 거라는 푸념을 하고, 술을 먹고, 어른들의 온갖 퇴폐적인 행동들이 가득 찬 호텔에서 창녀와 그저 대화만 하기를 시도하고, 선정적인 말이 갈기갈기 적혀있는 벽의 낙서를 있는 힘껏 지우는 콜필드. 그의 행동을 언뜻 보면 일탈하는 청소년과 다를 것 없이 보이지만, 어른들의 세계를 증오하고 그 증오를 표출하길 서슴지 않았고, 그것을 바꿀 수 없음에 한탄하여 너무나 고독했던 소년이었다. 그런 그에게, 스승 앤톨리니 선생은 특별한 이야기를 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좀 특별한 것처럼 보이는 타락'을 겪고 있다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환경이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찾는 것이라는 일종의, 특별한 타락.

  비록 그 좋은 말을 해주던 스승도, 갑작스러운 의심 때문에 콜필드에게 외면당했지만, '특별한 타락'이라는 말이 뇌리에 깊게 새겨진다. '청춘'이란 말보다도 그 의미는 깊다. 그는 어른들의 세계를 경멸했고, 그런 어른들을 흉내 내는 가식과 속물적인 친구들의 모습에 혀를 찼다.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16살이 그리던 '호밀밭의 파수꾼'. 그에게 세계는 벼랑이었다. 모든 게 구질구질하지만 완벽하게 탈출할 수는 없는, 그래서 콜필드는 벼랑의 마지막 한 발자국에 간신히 서 있다.

 

 세계에 대하여,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을 하고, 순수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경험하며 방황하며 남다른 성장통을 겪었던 콜필드. 질풍노도의 시기만이 불러일으킬 수 없는 순수한 반발, 지금은 그 모습조차 자신에게 찾아볼 수 없어 너무나 아쉽다. 옛날처럼 가혹한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저 속물적으로 맞춰가고 있다. 변했을까, 아니면 그 '특별한 타락'마저 경험하지 못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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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는 가버렸다. 해군 장교와 나는 서로 만나서 반가웠다는 인사를 나누었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전혀 반갑지도 않은 사람에게 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같은 인사말을 해야 한다는 건 말이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그런 말들을 해야만 한다.

릴리안에게 누군가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말해 버렸기 때문에, 그곳을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계속 거기서 어느 정도는 들어볼 만한 어니의 연주를 더 이상 들을 수가 없게 됐다 하지만 릴리안 시먼스와 해군 장교와 같이 앉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했다가는 끔찍하게 지겨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곳을 나왔다. 코트를 걸치면서 미치도록 화가 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정말 사람들은 언제나 남의 일을 훼방 놓곤 한다. (121p)

사람들 중에는 잃어버린 물건을 며칠이고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까지 난 무엇을 잃어버리든 전혀 찾으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겁이 많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변명하는 건 아니다. 정말 그런 건 아니다. 겁쟁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녀석의 턱을 날려버리고 싶다면, 그 순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지만 난 그런 걸 별로 잘하지 못한다. 턱을 한 대 갈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창문 밖으로 밀어버리거나, 그놈의 머리를 도끼로 잘라버리는 편이 훨씬 낫다. 난 주먹으로 싸움질하는 건 정말 싫다. 차라리 얻어 맞는 게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걸 좋아한다는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싸우면서 주먹질을 할 때 제일 나를 두렵게 만드는 건 상대 녀석의 얼굴이다. 문제는 내가 다른 자식들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둘 다 눈을 가리고 싸우라고 한다면 나을 것 같다. 정말 우습지도 않은 걸 겁낸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지금 난 농담하는게 아니다. (123p)

「성생활은 어때?」그에게 물었다. 그 녀석은 이 따위 질문을 받는 걸 싫어했다.

「가만히 좀 있어. 젠장. 그냥 좀 얌전히 앉아 있어봐」

「가만히 있잖아. 컬럼비아는 어때? 좋아?」

「당연하지. 싫은 데 다니는 사람 봤어?」그도 가끔은 이렇게 진부한 말을 하기도 한다.

「전공은 뭐야? 변태 성욕?」내가 물었다. 그저 좀 놀리고 싶을 뿐이었다.

「대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날 놀리는 거야?」

「아니야. 그냥 농담 좀 한 거야. 이봐, 루스. 넌 머리가 좋잖아. 그래서 말인데 네 충고가 필요해. 난 지금 끔찍한.......」

그는 나를 보더니 신음했다.「콜필드. 여기 있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 조용히 술이나 마시고, 그냥 조용한 대화나......」

「알았어, 알았다구. 가만히 있을게」그는 나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바로 이런 게 머리가 좋다는 인간들의 문제점이었다.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절대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193p)

「변호사는 괜찮지만...... 그렇게 썩 끌리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죄 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준다거나 하는 일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변호사가 되면 그럴 수많은 없게 되거든. 일단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몰려다니면서 골프를 치거나, 브리지를 해야만 해. 좋은 차를 사거나, 마티니를 마시면서 명사인 척하는 그런 짓들을 해야 한다는 거야. 그러다 보면, 정말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고 싶어서 그런 일을 한 건지, 아니면 굉장한 변호사가 되겠다고 그 일을 하는 건지 모르게 된다는 거지. 말하자면, 재판이 끝나고 법정에서 나올 때 신문기자니 뭐니 하는 사람들한테 잔뜩 둘러싸여 환호를 받는 삼류 영화의 주인공처럼 되는 거 말이야. 그렇게 되면 자기가 엉터리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겠니? 그게 문제라는 거지」 피비가 내 말을 알아듣고 이해했는지는 의심스러웠다. 아직 어린아이였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는 있다.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렇게 나쁠 건 없다. (2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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