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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 민음사
삶의 지혜를 찾는 영적 성장의 체험
헤세의 작품들을 좋아하지만, 사람 '헤르만 헤세'도 참 좋아한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겠지만 말이다. 그는 아름답고도 서정적인 말들을 쏟아내는가 하면, 폭주하는 듯이 날카로운 말들을 내놓고, 깨달음이 깊은 글들을 창조해낸다. 색감이 참 따뜻한 그림도 그린다. 유약한 학자 느낌이 나는 얼굴에, 지루하지 않고 따분하지 않는 다양한 소재로 작품을 써낸다. 이성과 감성, 둘 다 넘치고 넘쳐 보이는 작가 헤르만 헤세, 그에게는 정신적인 고통으로 치료를 받던 안타까운 시간이 있었는데 그의 시간을 지켜주었던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싯다르타』 는 동양에 대한 헤세의 관심이 투영된 책이며, 성장 소설이고, 그에겐 '수양'과도 같은 책이었다.
실제로 부처의 본명이 '싯다르타' 였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부처'의 생애를 다룬 소설이 아니라 (그러나 소설의 중간, 고타마 싯다르타를 만나기도 한다) 부처와 이름이 같은, 바라문의 아들 '싯다르타'의 성장 소설이다. 그는 인도에서 가장 높은 계급을 가지고 있었으며, 부모님의 바람은 그가 학자가 되는 것이었지만 싯다르타는 조금 다른 길을 선택한다. 자아의 근원을 찾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사문 - 떠돌이 승 - 의 삶을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뜻을 무언으로 전달하여 결국 사문이 된다. 그런 그의 곁을 항상 지키고 있었던 것은 친구인 '고빈다'. 그 둘은 세상에 있는 신성한 가치와 깨달음을 찾아 서로 문답을 하며 길을 떠난다.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간 그에게 어찌 역경이 없었겠으나,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역경을 맞이하게 된다. 스승과 교리의 가르침으로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주장 하에, 싯다르타는 사문 행렬에서 빠져나오고, 사랑하는 여자와 부유한 상인을 만나 세속적인 욕망을 안게 된다. 일종의 유희였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지만, 그는 시간이 흐른 후 그 모두가 '윤회'였고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또 다른 현인, 뱃사공을 만난다.
세상의 모든 진리는 누군가에 의해서나 어떤 것에 의해서나 전달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석가모니는 종교의 '세존'이 되기까지, 교리에서 가르쳐줄 수 없는 그만의 깨달음을 얻었고 그로 인해 부처가 된 것이다. 헤세가 그만의 관심으로 엮어낸 불교 철학의 상징 속에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삶은 연속되는 성장의 길이며 어떤 것도 지속되지 않은 채 변화한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즉 산과 강 자연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자아는 결국 자신을 비움으로써 발견하게 된다. 『싯다르타』는 이렇듯 헤세가 믿었던 불교 철학에 대한 책이며, 불교의 철학 중 '심우도'를 떠올리게도 한 책이며, 실제로 '고타마 싯다르타(부처 - 석가모니)'가 살았던 삶과 맥을 같이 하기도 한다. 하지만 불교를 빼놓고서라도, 책 속의 깨달음을 우리 삶에 대입할 수도 있다. 삶은 성장이며 성숙이며, 경험이고, 그 자체로 지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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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하고 있는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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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창조한 것은 정말로 프라야파티일까? 세상을 창조한 것은 유일자이자 단독자인 아트만이 아닐까? 신들도 너와 나와 마찬가지로 창조된, 시간에 예속되어 있는, 덧없는 피조물들은 아닐까? 그렇다면,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좋은 일이고, 올바른 일이고, 뜻있는 최고의 일일까? 제사를 지내고 숭배하여야 할 존재가 유일자인 아트만 말고 또 있을까? 그렇다면 아트만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은 도대체 어디에 살고 있으며 그것의 영원한 심장은 어디에서 고동치고 있는가? 그것은 각자가 자기 내면에 지니고 있는 가장 내적이자 불멸의 것 바로 자기 자신의 자아 속에서 고동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이 자아, 가장 내적인 것, 이 궁극적인 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가장 지혜로운 현인들은 그것이 살이나 뼈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생각 속에 있는 것도 의식 속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가르쳤다. 어디에, 그렇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곳으로, 자아를 향하여, 나에게로, 아트만에게로 나아가는 어떤 다른 길, 애써 추구할 만한 보람이 있는 길이 있을까? 아, 그런데 슬프게도 아무도 이 길을 알려주지 않았으며, 그 길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 아버지도 스승인 현인들도, 그리고 제사를 지낼 때 부르는 신성한 노래들도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16p)
그리고 언젠가 또 한 번,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동료들과 스승들이 먹을 양식을 구걸하기 위하여 싯다르타가 고빈다와 함께 그 숲을 떠났을 때, 싯다르타가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말이야, 고빈다, 우리가 올바른 길을 걷고는 있는 것일가? 우리가 도대체 인식에 접근하고는 있는 것일까? 우리가 도대체 해탈의 경지에 접근하고는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그러니까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상상하였던 우리가, 혹시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빈다가 말하였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어, 싯다르타, 그리고 아직도 배울 것이 많이 있네. 우리는 쳇바퀴처럼 맴돌도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위를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 거야. 그 바퀴는 둥근 원이 아니라 나선형이고, 우리는 이미 많은 단계들을 거쳐온거야.」(33p)
싯다르타는 이미 그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을 걷고 있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사실, 즉 자신이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으며,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영위해 온 생활이 이제는 다 지나가 버린 과거지사가 되었으며, 구역질이 날 정도까지 그 생활을 실컷 맛보고 남김없이 빨아 마셨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을 알 수 있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가 꿈 속에서 보았던 새는 죽어 있었다. 그 새는 그의 마음속에서 죽어 있었다. 그는 윤회의 업보에 휘말려들어갔다. 마치 해면이 물을 가득 머금을 때까지 물을 흠뻑 빨아 들이듯, 그는 사방에서 구토와 죽음을 자신 속으로 빨아들였다. 그의 마음은 권태와 번민, 그리고 죽음으로 온통 가득 찼으며, 그를 유혹할 수 있는 것, 그를 기쁘게 해줄 수 잇는 것, 그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신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게 되지 않기를, 안식을 얻기를, 죽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1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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