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누아르 - 범죄의 기원 무블 시리즈 1
김탁환.이원태 지음 / 민음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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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누아르, 범죄의 기원』 원탁 (이원태, 김탁환) / 민음사

 무블 시리즈의 시작, 과거에 의해 현재를 보다

 

 

  올 한해 출판계는 미디어 셀러 열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미디어 셀러(Media Seller)는 말 그대로, 미디어에 노출되어 화제가 된 책들을 말하지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원작 소설'등을 일컫고 있습니다. 영화의 영상미와 책의 전달력이 더해진 미디어 셀러는 크나큰 장점이 있죠. 그래서 그런지 원작 소설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이야기를 가진 영화 시나리오를 개봉에 맞추어 소설과 함께 출간하는 경우나, 영화 흥행 후에 새로 출간되어 나오는 책들을 참 많이 만나봤던 것 같습니다. 『조선 누아르, 범죄의 기원』도 이런 미디어 셀러 열풍에 힘입어 출간된 소설입니다. 영화 연출, 제작자인 이원태와 작가 김탁환이 '원탁'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낸 첫 소설이지요. 이전에 이 두 분이 기획 작업을 같이 하셨었는데, 소설로 나온 것은 새로운 시도입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소설을 다시 만들어 출간하면서 영화화 계약을 맺었죠. 책표지에 쓰여있는 Movel이라는 용어로 이 시리즈가 얼마만큼의 파급력을 불러일으킬지 참 기대가 됩니다.

 

  영화가 기대되는 것도, 이 책이 워낙에 독특한 데다가 엄청난 흡입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조선 누아르, 범죄의 기원』은 주인공인 나용주가 마포 검계 (지금으로 말하자면 폭력 조직이라고 말할 수 있는)의 대두령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요. 그의 과거가 참 화려합니다. 원래는 사당패의 광대였고 다양한 사람과 사건을 만나면서 호위무사와 검계의 일원이 되며 결국에는 검계의 최고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조선 누아르'라고 자신 있게 붙인 이 소설에는 '범죄의 기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주인공의 남다른 과거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배신과 약속, 엄청난 권력 다툼과 당파 싸움이 리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 속에서 주인공은 남다른 소신으로 특별한 캐릭터를 구축하고 있는데요. 죽음과 폭력이 난무하는 검계와, 그 검계를 이용하려는 권력들에 맞서 어느 정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물론 그가 '선인'은 아니며 '악'과 '범죄'를 기반으로 성장했지만, 우리는 그나마 나은 '나용주'라는 인물에 몰입하며 선인이라는 착각을 하며 보게 되는 거죠.

 

 그러나 일단 재미있게 본 이야기는 결국 우리에게 찝찝함을 남깁니다. 분명 '조선 누아르'인데, 현대와 그리 다를 것 없는 이야기에 한숨을 쉬게 됩니다. 불법과 폭력으로 뒤덮인 어느 한 집단과 그 집단을 권력에 이용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권력으로 국가 전체를 흔들려는 사람들. 누아르의 어두운 세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것일까요. 범죄를 소탕한다는 명분에 따라 벌어지는 책 속의 무시무시한 권력 다툼은 대체 범죄와 악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의문을 품게 합니다.

 

  스릴 있고, 특별한 공기에 눈을 뗄 수 없었던 『조선 누아르, 범죄의 기원』. 저는 개인적으로 탈을 쓰고 광대의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그려진 앞부분과 탈놀이를 인생에 대입하여 표현해낸 부분들이 특히 좋았습니다.  "탈을 쓴 광대는 오직 반복된 연습에 의해 자신에게 덧씌워진 타인의 삶을 그럴싸하게 상상하고 말과 행동으로 옮긴다. 아무리 과장해도 늘 어딘가 부족하다. 채워지지 않는 부재와 어색함과 불일치가 좋았다. (11p)" 는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조선 누아르, 범죄의 기원』이 영화로 나온다면, 한국형 대표 누아르가 될 수 있을지 벌써 기대가 됩니다.

 

 

 

​- 다음 무블 시리즈의 제목이 『조선 마술사』인데, 벌써 영화화 계약에 유승호 캐스팅까지...

정말 후덜덜한 시리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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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지원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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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길이 피식 웃으며 내 등에 올라탔다. 왼손으로 어깨를 누른 채 말발굽 표식을 새길 자리에 칼끝을 갖다 댔다. 칼날이 단숨에 살갗을 파고들었다. 어금니를 앙다물었지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명길이 수건을 집어 다시 입 가까이 들어 보였다. 물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칼날의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대인과의 약속을 단 한 번 어긴 탓에 삶이 송두리째 바뀐 것이다. 열두살 계집아이 셋을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변명도 핑계다. 약속을 무겁게 받아들였다면, 비를 휘드르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았으리라. 꿇어 엎드려 빌며 시간이라도 끌었으리라. 나는 단숨에 양반 도령들을 제압하는 쪽을 택했다. 대인과의 약속을 쉽게 깬 결과가 바로 지금 이 칼날로 돌아온 셈이다. 살면서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낀 순간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31p)

광대였던 것, 검계였던 것, 별감이었던 것. 모두 한판 탈놀음이다. 나는 이 셋의 차이를 극명하게 춤사위에 담지만, 취한 세상은 그 셋을 구별 못한다. 나눌 의지도 없다. 이것도 탈춤이고 저것도 탈춤이고 그것도 탈춤이다. 얼쑤 얼쑤 얼씨구 좋다. 다음도 그러할까. 왕자의 호위무사라고 다를 까닭이 없다. 탈놀음의 소재만 하나 더 느는 셈이다. 한데 변신의 횟수가 더할 수록 쓸쓸함은 왜 점점 깊어질까. 마음의 구멍은 왜 더 자주 크게 뚫릴까. 황소바람이 불까. (77p)

그 눈망울을 보며, 헛된 꿈을 잠시 꾸었다. 찰나지만 내 인생 전부를 바꾸는 꿈이었다. 나는 이 눈망울을 지닌 사내의 진정한 벗이 되고 싶어졌다. 벗이란, 탈을 벗고 맨 얼굴로 서로를 봐야 한다. 나는 지금부터 내가 벌일 짓의 결말을 가늠해 보았다. 벗이 되자마자, 그러니까 내가 누구인지를 밝히자마자, 그는 나를 벗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칠 것이다. 함께 우정을 나눌 시간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벗인 체 하며 그의 곁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다 그 눈망울 때문이었다. (125p)

역사서를 뒤적여 보면 열에 아홉은, 극단으로 치닫지 않고 왕과 신하가 중간 어느 지점에서 타협하여 정치를 잇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날의 궁중회의는 왕은 왕대로 신하들은 신하들대로 어떤 극단을 상정하게 만들었다. 왕이 이긴다면 조덕신의 배신과 두 신하의 음주를 지렛대 삼아 검계와 결탁된 붕당들의 본색이 만천하에 밝혀질 것이고, 신하들이 이긴다면 두 당상관의 참형에 세자 이호의 죽음과 선왕의 급사까지 얹어 비천한 출생에서 비롯된 왕의 광증으로 폭로될 것이다. 결과가 어찌 되든 둘 다 피비린내가 진동할 것이다. 진정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2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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