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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꽃이 모랑모랑 피어서 - 제2회 퍼플로맨스 대상 수상작
박소정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12월
평점 :
『모란꽃이 모랑모랑 피어서』 박소정 / 다산북스
꽃내음이 가득한 소설, '나는 조선의 조향사입니다'
조선에도 '조향사'가 있었다면 믿으시겠나요? 조향사라고 이름 붙여진 기록은 어디에도 없지만, 비슷한 일을 하던 사람들은 있었답니다. 바로, 향장(香匠)입니다. 약을 다루는 내의원과 옷을 다루는 상의원에서 향을 제조하는 일을 했다고 하죠. 『모란꽃이 모랑모랑 피어서』는 향장(香匠)의 존재에 상상력을 보태어, '그곳에서 일하던 장인 중 지금의 조향사를 꿈꾸는 사람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로 풀어낸 소설입니다. 역사적 사실이 토대가 되지만, 그 기록은 많은 부분을 차지하진 않습니다. 실제 조선 시대 17대 왕이었던 효종 (봉림대군)과 그의 네 번째 부인이었지만 거의 기록이 없는 '숙원 정 씨'의 사랑을 허구로 재구성한 소설이지요.
역사와 완벽하게 일치되지는 않으나, 허구의 소설이라는 단정 하에 이 이야기는 역사보다 상상력에 초점을 맞춥니다. 세상의 수많은 향을 감각 속에 남기고, 그것을 혼합하여 매혹적이고 곳곳에 알맞은 향으로 만들어내려는 꿈을 가졌던 한 여인의 일생을 다루고 있습니다. 『모란꽃이 모랑모랑 피어서』라는 제목처럼, 책 속에는 향기로운 꽃내음이 가득하지요. 언뜻 수박 향기가 나는 민물고기의 냄새, 약방에 있는 강한 한약재의 냄새, 산뜻하고 부드러운 무화과 꽃의 향, 이 다양한 향기들이 코앞에 다가옵니다. 현대의 향수 제조 방법을 나름의 방식으로 만들어낸 장면은 가히 일품입니다. 주인공 '수연'이 사랑하는 향기들을 모아 단계를 고려해서 만든 향유는 그녀만이 추억할 수 있는 향입니다. 치자꽃과 측백나무 향기, 감각을 온통 곤두세우고 그리움과 눈물이 끊이질 않게 하는 향연이죠.
향기를 담은 또 다른 소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를 말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 무게와 분위기 면에서 이 소설과는 현저히 차이가 나지만, 추억이 담긴 향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수연의 모습은, 자신의 생명까지 향기 속으로 잠식해버렸던『향수』의 괴이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향기는 정말로 무섭도록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것 같달까요. 때로는 정말 미세하게 들어오는 냄새 하나가 작은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 눈앞에 큰 그림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향기 나는 작은 꽃 하나가 방안에 온통 자신의 흔적을 찌르르 남기게 하는 걸 보면요.
교보문고 퍼플 로맨스 대상 수상작이라는 이 소설. 시간 구성이나 각종 극적인 상황이 맘에 안 드는 부분도 있었던 것은 '수상작'이라는 글씨가 불러일으키는 왠지 모를 기대감 때문이었을까요. 조선의 '조향사'라는 독특한 소재로 만들어낸 소설은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던, 책 속의 수많은 향기를 직접 찾아 나서고 싶은 생각도 들게 했습니다. "백 가지 향보다 진한 천 일간의 사랑 이야기"라고 띠지에 적혀있지만, 사랑 이야기보다도 숨 막히게 예뻤던 향기가 더욱 소설의 여운을 깊게 하는 것 같아요.
- 원래는 꽃과 함께 찍는 미션이었는데, 거실에 놓인 꽃모양의 디퓨저로 대신했습니다.
이 작은 디퓨저 하나가, 거실의 큰 공간을 향기로 채워주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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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터즈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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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번째 향입니다. 어떤 것의 향입니까?" 아시타가 물었다. 그녀의 머리칼이 꽤 자랐다.
아침에 수연은 동백 기름으로 아시타의 머리를 빗고 그녀와 어울리는 진주 뒤꽂이를 꽂아주었다. 수연은 다시 희미한 향기에 집중했다. 무슨 향일까. 풋풋한 단내가 나는 것으로 보아 과일이다. 과일 중에서도 물기가 많은. 여름. 여름 과일. 은이와 함께했던 여름에 영산강을 걷던 기억. 수박. 수박일까? 살포시 물비린내가 난다. 수박에 비린내가 나? 아니면 오이인가? 오이는 단내가 나지 않아. 설마 수박이 상하는 중일까? "수박입니까?" 수연의 대답에 자신이 없다. "아닙니다." 아시타의 말에 수연은 눈을 가린 천을 풀어 접시에 올라온 것을 보았다. 은회색으로 반짝이는 은어다. 수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116p)
쌉싸름하면서도 상큼한 금귤과 넝쿨 내음 물씬 풍기는 우아한 포도는 향기의 첫 인상. 가장 먼저 휘발되는 향이기에 수연은 하늘에 속하는 단계라 이름 붙였다. 다음, 사람에 속하는 치자꽃과 측백나무. 이 단계를 고르기가 제일 어려웠다. 향수의 기둥이자 중심이 되어줄 향유를 선택해야만 했다. 작약으로 할까, 수수꽃다리로 할까, 그도 아니면 소나무가 좋을까. 여러 후보를 생각해봐도 흡족하지 않았다. 결국 수연은 항복하듯 치자꽃과 측백나무를 택했다. 그것이 단과 대군의 향기였으니까. 외면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눈에 밟히는 사람, 혹은 사랑들. 마지막, 물기 어린 흙의 분신 이끼와 따스하면서도 달달한 백단나무. 땅에 속하는 단계이다. 무거운 입자이기 때문에 향수의 토대가 되어주겠지.
오래도록 남아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으면서 아쉬움을 전해줄 것이다. (176p)
수연은 흠뻑 젖은 치마폭에 얼굴을 묻었다. 가슴 깊이 단과 대군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실험은 성공이구나. 치자꽃 향과 측백나무 향이 싱그러웠다. 어떠한 상함도, 악함도, 불협화음도 없었다. 눈물 젖은 얼굴을 치마폭에 비비던 수연은 빙긋이 미소 지었다.
결국 당신을 울게 하는 것. 그것이 향이고 향이 가진 힘이라 믿었다.
그립다는 게 무언지 뼈저리게 배우고서 얻은 깨달음이었다. 그 힘을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나는 웃고, 당신을 울릴 수 있도록. 그 힘에 이렇게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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