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경 - 우리는 통일을 이룬 적이 있었다
손정미 지음 / 샘터사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왕경』 손정미 / 샘터

 통일을 이루었던 신라의 수도, 그 곳에서 벌어졌던 이야기

 

 

   연표로 되어 있는 기록과 정부의 제도 따위를 달달 외우던 기억이 나는 역사 공부, 특히나 삼국시대에 대한 관심은 정말 적었다. 범위가 참 광범위하다고 느꼈을 뿐만 아니라, 뭔가 아득히 먼일 같기도 해서 참 와 닿지 않았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비어있는 지식의 공백을 조금 채워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왕경』의 시작은, "삼국 중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대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다. 단 한 번도 심각하게 고민해보지 못했던 질문이지만, 현재의 우리가 존재함에 굉장히 큰 작용을 했을지도 모르는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다.

  ​청춘들을 등장시켜 풀어내는 그 당시의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롭다. 고구려에서 가장 강한 자를 뽑는 시합 이후 음모를 통해 신라의 포로로 가게 된 고구려 소년 '진수', 숙부와 함께 신라에 잠입한 백제의 소녀 '정', 그리고 신라의 화랑 '김유'가 신라의 수도인 '왕경'에 모여 일어나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삼국의 젊은이들이 한곳에 모여 각자의 사정과 야망에 대해 꿈을 품고 있다는 상황이 극적이지만, '혹시나' 이런 상황이 정말 있지는 않았을까 하고 상상하게 된다. 젊은 나이에 큰 짐을 짊어져야 했고, 그렇게 우연히 적으로 만난 그들의 인연이 조금은 안타까웠지만, 정말 이렇게 다양한 국가에 섞여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 적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도 해본다.

  역사도 있고, 사랑도 있고, 시대의 고민도 있고, 반전도 있었다. 그저 역사적인 사실로만 여겼던 놀라운 '통일'에 대하여 파고들어 궁금증을 주었다. 통일 직전의 상황을 굉장히 상세하게 다루고 있어 꼼꼼하기 그지없는 책이었고, 신라 화랑의 일상과 세계의 상업을 연결하던 실크로드, 당시 왕정의 상황, 지식의 욕심으로 파고들던 서책들까지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특히나 서역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방대한 산업의 발전이 놀랍게 느껴졌다.

  ​그러나 너무나 판을 많이 벌인 느낌이랄까. 탄탄한 역사적 사실과 신라의 수도 '왕경'의 매력이 거하게 다뤄진 책의 내용이 한 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주인공들의 상황을 완벽하게 해결할 시간과 분량이 조금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이, 뚝 끊기는 느낌에 조금은 아쉬웠다.

 

 

Copyright ⓒ 2014. by 리니의 컬쳐톡 All Rights Reserved.
서포터즈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덧글과 공감은 글쓴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김유는 술잔에 뜬 달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 곡조 들어보자."

바람이 물결을 깨우는 경포호에 피리 소리가 감아들 듯 울려 퍼졌다. 달빛을 튕기듯 피리 소리가 청아하게 울리자 김유의 가슴이 에이는 듯했다.

얼굴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계집이 겁도 없이. 달빛 아래 구름처럼 흐르던 하얀 가슴이 떠올랐다.

김유가 두 손으로 어깨를 내리누르며 눈을 쏘아보았지만 계집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한 눈빛으로 받아쳤다.

그 순간 정과 김유의 사이에는 번개 같은 강한 전율이 순식간에 관통했다. 이 세상의 모든 기운이 응축돼 창처럼 날카롭고 강하게 두 사람을 꿰뚫고 지나갔다. 순간 김유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우주의 어느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주 공간으로 퍼져 나간 듯했다. 밤하늘의 모든 별들이 쏟아져 내린 뒤 온통 휘감는 체험이었다.

눈앞의 경포호가 흔들리고 있었다. 달빛 아래 연주는 멈추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100p)


고구려, 백제군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랐고 그땐 언제든지 말을 몰아 전장에 나가야 했다. 백제 의자왕이 왕위에 오른 뒤로는 계림을 위협하는 일이 많아졌고 전투가 벌어지면 귀공자들이 앞장서야 했다. 아버지를 잃고 형을 잃은 자가 한둘이 아니었고 언제 자신의 차례가 될지 몰랐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포로를 노비로 받고 녹읍을 하사받지만 패장이 되면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비겁하게 굴복해 살아 돌아온다 해도 왕경의 싸늘한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 부모는 그런 자식을 보지 않았고 철저하게 따돌림을 당했다. 시종들마저 우습게 보며 손가락질을 해댔다.

전장에 나가선 죽기 살기로 싸워 이겨야 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귀공자들에겐 오늘 하루 이 밤이 소중했다. (143p)

곡강의 바람이 김유에게 속삭였다. `저 아이가 몰래 요초 (먹으면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는 노란 꽃)를 먹인 게 틀림없어.`

진수는 정을 쳐다보는 김유의 눈길을 느끼자 무엇에 찔린 듯했다.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왔다. 왕경에서 죽일 듯 달려들던 김유의 얼굴과 표정이 아니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진수는 혼자 술병을 거의 다 비우고 있었다. 꽤 독하다는 술이었는데도 취하지 않았다.

`견당사나 숙위를 처단하면 평양에 돌아가서도 공을 치하받을 거야. 허물이 있다면 용서받을 거고.`

정은 갑자기 말할 수 없이 목이 타 남은 술을 마셔버렸다. 울적한 마음을 술에 태우고 싶었다. 술기운에 머리가 무거웠지만 나쁘지 않았다.

뭇 계집의 눈길을 받은 진수가 눈앞에 있다. 진수가 갑자기 냉랭해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무슨일일까?

`곡강이 눈앞에 있는데 무슨 잡생각이야. 시인들이 읊었던 곡강이라구. 지금은 즐길 때야.`

세 사람의 눈빛은 각기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 위로 곡강의 물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259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