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 영혼이 향기로웠던 날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안내하는 마법
필립 클로델 지음, 심하은 옮김 / 샘터사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향기』 필립 클로델 / 샘터

 냄새로 추억과 순간을 회상하다

 

 

 

   누구에게나 후각으로 기억하는 장면들과 사물들이 있게 마련이다. 향기 (혹은 냄새)와 추억을 연결해 생각한다면, 아마도 각자 나름의 그림이 그려지겠지. 나는 엄마가 보글보글 김치찌개를 끓이던 날에 현관 앞에까지 고소하고 짭조름한 냄새가 풍겨왔던 기억을, 무더운 여름에 먼지 풀풀 날리는 에어컨을 부모님이 청소하고 나서 전원을 켜면 바람이 나오는 그 앞에서 얼굴을 들이밀고 바람 냄새를 맡았던 기억을, 캠핑을 자주 가던 아주 어렸을 때에 산속의 계곡에서 끓여먹던 라면 냄새와 물 냄새가 섞여 후각을 북돋았던 잊을 수 없는 기억을 회상한다. 생각해보면 아주 사소하고 별것 아닌 장면들이지만, 그 냄새와 이미지가 무척이나 강렬하여 절대로 잊히진 않을 것만 같다.

 

  영화감독이자 많은 소설을 펴낸 프랑스의 작가 '필립 클로델'이 새롭게 선보인 이번 책, 『향기 자신이 기억하는 향기와 추억의 이미지를 듬뿍 담아낸 공감각적 산문집이다. 지금은 돌아갈 수 없고, 후각으로만 기억하는 추억들을 하나하나 나열하고 있는데, 자신이 선택한 '추억'과 '향기'의 키워드를 토대로 짧은 이야기들을 적어내고 있다. 조금 별난 점은, '향기'라고 언급했을 때의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깨뜨린다는 점이다. '향기'라고 한다면, 보통은 '특히 좋은 냄새'를 표방하고 있는데, 필립 클로델은 그러한 사전적 의미를 넘어 절대 '향기'라고 부를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물들과 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사체, 집, 오토바이 엔진, 타르, 그리고 죽음까지, 다소 충격적이고 독특한 향연을 펼쳐내고 있는 셈이다.

 

  지금은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추억을 상기시키도록 '향기'가 도와주고 있고, 어디에나 있을법한 공간들도 향기를 통해 그 틀을 만든다. '영화감독'이란 특별한 직업이 주는 이점일까, 『향기』를 표현하는 필립 클로델의 글은 마치 영상을 보는 듯 풍부하고 묘사적이다. 사용한 어휘들이나 구체적으로 표현해낸 사물들도 어찌나 다양한지. 향기로 기억하는 순간들을 이렇듯 멋지게 표현해냈다는 점에서는 정말 경탄할 만하다. 하지만 작가의 특성인지, 문득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리는 듯한 서술 때문인지, 조금은 간단하고 건조하게 표현되는 글들에 특별히 공감할 수 없는 부분들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다양한 소재들을 통하여 세상의 공기에 섞이고 있는 '향기'​들을 상상하면서 읽다가도, 그만의 넘치는 감성을 뒤따를 수 없었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다채로운 '향기'에 관한 이야기는 또한, 독자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는 특별한 '향기'들을 펼쳐놓게 만든다. "내가 좋아했던 향기는 뭐였지", "그때 풍겨 나오던 향기는 어떤 향기였지." 하고 말이다. 그리고 추억을 상기시키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던 이 책은 작가에게도 무척 의미가 깊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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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터즈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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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런한 푸른 풀, 적갈색 대지, 노래하는 무수한 것들.

그리고 갑자기 죽음에 부딪힌다. 머리 아픈 죽음. 달콤한 죽음. 동물의 죽음. 끔찍한 죽음.

끔찍함, 아마도 실상은 그렇게 끔찍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실패한 죽음이랄까. 잘못 저어 냄비 바닥에 고기 한 점이 가라앉아 익힌 스튜 요리 같다. 종종 냄새로만 그친다. 짐승의 사체는 찾을 수가 없다. 냄새가 나는 건 환영일까, 아니면 우리의 두려움일까? (62p, 사체)

내가 들이마시는 것은 깨끗이 빤 천 냄새만이 아니다. 야생적이고 광대한, 대지와 바람의 지형도, 내가 읽고 보았던 이야기와 우화와 노래와 이미지의 무한한 연장의 냄새, 지붕 아래, 할머니들과 이모할머니들이 옛날에 참을성 있는 바느질로 꽃과 곡선과 아라베스크로 장식했던새 시트가 팽팽히 당겨져 씌워진 이 침대, 잠의 첫걸음 속에서 안심하고 쉬는 천상의 여행자. 적어도 한순간은 보호받고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처받기 쉬운 존재로 만들어주는 냄새다. (100p, 새 시트)

일용잡화점은 일종의 잔재다. 잡화상은 그 시대의 생존자다. 그곳은 특히 피부, 나무, 철, 가죽, 놋쇠, 타일, 유리창 같이 더러워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씻어낼 도구 혹은 수도 배관, 하수구, 화장실같이 막힐 수 있는 모든 것을 뚫을 도구를 찾을 수 있는 안성맞춤의 장소다. 분말, 페인트, 용매, 용제, 연마제, 비누나 액체 비누, 독극물, 비료, 제초제, 고엽제, 쥐약, 질산염, 황산염, 염소산염, 가성소다, 생석회, 니스, 유약, 타르, 유향등 여기 있는 건 그 무엇도 먹을 수 없다. 게임을 뜨고자 하는 절망한 노름꾼들을 제외하고는. (103p, 잡화점)

현재의 우리 또는 과거의 우리에 대해, 깊이 잠든 어린아이의 살냄새만큼 더 잘 이야기해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침대 속에서 입을 반쯤 벌린 채 두려움도 공포도 전율도 없이 쉬고 있는 어린아이는 우리가 늘 가까이 붙어 어둠을 쫓고, 흩뜨리고 필요하다면 그 어둠을 부정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108p, 잠든 아이)

글자 하나가 하나의 냄새를, 동사 하나가 하나의 향기를 품고 있다. 단어 하나가 기억 속에 어떤 장소와 그곳의 향기를 퍼뜨린다. 그리고 알파벳과 추억이 우연히 결합하여 조금씩 직조되는 텍스트는, 꿈꾸는 삶과 지나온 삶과 다가올 삼으로 우리를 차례로 안내하는 경이로운 강물이 되어 흘러간다. 수천 갈래로 갈라지며 향기를 뿜으며. (271p,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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