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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해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7월
평점 :
『극해』 임성순 / 은행나무
고립된 장소에서 활개치는 '악'의 본성에 대하여
참 비참하고 안타까운 세월이었다. 오래된 옛날부터 침략이 끊이지 않던 우리나라에는 또 한 번 식민지의 아픔이 이어졌다.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점점 하나씩 드러나는 과거 속에는 부당하게 당해야 했던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 있었다. 『극해』는 바로 이 시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배 속의 지배자가 된 일본인, 자원하거나 징용되어 온 한국인, 대만인과 필리핀인들이 유키마루라는 배에 승선한다. 하급선원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배에서 견딘다. 고래를 잡아 오랜만에 기름과 고기 맛을 볼 때, 열대지방을 지나며 찾아온 가뭄 끝에 폭풍우 비가 와서 목을 축일 때, 약간의 행복감을 느끼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위기가 닥쳐온다. 책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접한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일본인들의 탄압과 부당한 대우를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보다 더 복잡한 차원으로 소설의 방향을 전환한다.
고립된 장소에서 '악'은 더욱더 활개치기 마련이다. 갑작스러운 폭격으로 엔진이 고장 나 남극으로 향하게 된 유키마루선은 하나의 전쟁터가 되어간다. 일본인들의 지배와 탐욕을 견딜 수 없었던 한국인들은 항거하기 시작한다. 그리곤 일어난 살인사건. 죽음이 바로 앞에 있는 극한의 상황과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한 행동은 점점 악으로, 악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명분과 정당성을 잃은 항의와 울분은 악으로 변질되고, 변질된 악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순환되기 시작한다.
소설은 극한의 장소를 다룬 여느 소설들과 비슷하게 흘러갈 듯했지만, 『극해』 는 생각했던 시점에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악'에 부당하게 싸우고 살아남기 위해 버텨야 했던 우리는 지금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과거의 아픔에 대한 분노, 채 지워지지 않은 큰 응어리를 되려 다른 약한 사람들에게 풀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가 당했던 폭력을, 권력을, 부당함을, 그대로 다른 이에게 되돌려주고 있지는 않은지.
"이곳은 가장 푸른 사막이자, 가장 단순한 미로였다." "모든 세상이 검은 물결에 휩쓸려 위아래로 요동쳤다."
하나로 뒤엉켜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도 모르는 채 아등바등 하고 있는 유키마루 선원들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보다 큰 이 세계를 대변한다. 전쟁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다양한 인종들이 모이지 않았다면 조금은 편안했을까. 그리고 그 물음들은 결국 하나의 물음으로 집결되었다. "그들은 왜 싸워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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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하고 있는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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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갑판으로 끌어올린 어린 학생들을 보니 마음이 복잡했다. 아직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아이들은 생쥐처럼 홀딱 젖어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내선합일을 위해 황국신민으로서 일사보국하라는 동료들의 강연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 그럴듯한 말을 쉽게 바꾸자면 우리가 진짜 일본인이 되고 일본에게 차별받지 않으려면 젊은 너희들이 전쟁터에 나가 죽으라는 뜻이었다. 저 밤바다 건너편 어딘가에서 그들은 그 강연 덕에 월급을 받으며 자신의 삶을 영위해갈 터였다. 밤바다를 아무 의미 없이, 그저 목숨을 건지기 위해 헤엄치다 죽어야 하는 젊은이들의 운명 따윈 꿈조차 꾸지 못하리라. 선생은 입안이 썼다. 애국이란 그럴듯한 말로 그들을 사지로 내몬 이들은 결코 단죄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의 피로 애국을 외치는 이들은 세상이 바뀌어도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걸
"먹어, 살려면 먹어야지." 정섭 옆에 있던 선생은 말라비틀어진 건어물처럼 보였다. 조그라들지 않은 것은 그의 검은 뿔테 안경뿐이었다. 정섭은 다시 물고기를 바라보았다. 고등어는 파닥거리며 아가미를 벌름거렸다. 그래.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정섭은 고등어의 몸통을 물어뜯었다. 피 맛은 짭짤했다. 그러나 고기는 의외로 비리지 않고 담백했다. 고등어는 더욱 요란하게 몸부림쳤다. 입안에서 생명의 마지막 몸부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짭짤한, 그러나 차가운 물고기의 피가 식도로 흘러들어가, 갈라지고 말라터진 뜨거운 목을 식혀주었다. 정섭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물어뜯은 고등어의 몸통을 쭉쭉 빨아댔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그 살점을 물어뜯었다. 정섭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손에 머리와 가시, 그리고 꼬리와 지느러미만 남았다. 정섭은 남은 것들을 푸른 바다에 던졌다. 넘실거리는 푸른 물은 죽은 고등어를 집어 삼켰다. 바다가 눈앞에서 일렁거렸다. 정섭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고개를 돌리면 어디든 물이 있었다. 다만 마실 수 없을 뿐이었다. 파도는 출렁일 때마다 미로의 벽처럼 치솟았다 사라졌다. 이곳은 가장 푸른 사막이자, 가장 단순한 미로였다. (98p)
"그 새끼들도 처리해야지." 만덕이 이렇게 말하자 선원들은 하나둘 동조를 했다. "그래, 바다는 넓으니까 그 떼놈들 자리도 있을 거야." "그놈들이 남극에서 한 짓을 생각하면......" 선생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을 죽이는 편이 정섭의 말처럼 후환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일은 정당성을 잃었다. 지금 하는 일은 정당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들이 하는 짓은 일본인들이 했던 짓과 다를 바 없는, 아니 그보다 더 고약한 일이 될 터였다. (1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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