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오에 겐자부로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오에 겐자부로 / 문학과 지성사

 버려져 남겨진 사람들, 되살리지 못한 '인간애'

 

 

 

  '전쟁'이 끔찍한 이유는 여기저기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이 일어나서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야만적인 본성이 가장 자극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밑바닥에 남은 인간성마저 깡그리 없애버릴 것만 같은 전쟁, 우리는 언제나 평화를 부르짖지만, 지금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는 전투와 내전들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그리고 전쟁을 더 끔찍하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는 국가적 이익과 지배층들의 욕심 등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기 때문이다.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피난을 가는 사람들, 가만히 있다가 큰 피해를 당하는 민간인들,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원래는 누군가의 가족이었던) 장병들.......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한 (물론 생애 절대로 경험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전쟁문학과 영화 등을 통해서 그것을 간접적으로 본다. 그들이 보통 초점을 맞추는 것은 역시, 희생되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 끔찍한 상황에서도 남아있는 '인간애'다. 그 이유는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이 많은 작품들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의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이며, 평화와 반전주의 작가로 잘 알려진 '오에 겐자부로'는 꽤 오랫동안 그런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는 그의 첫 장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인간성의 소실에 대한 깊은 고민이 드러나있는 작품이다. 소설 속 내용을 보자면,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이 집단적인 광기를 내뿜었던 그 시대에, '비행소년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서 골라진' 많은 청소년들이 '감화원'이라는 곳에 갇힌다. 전쟁이 심각해지면서 그들은 어떤 산골 벽촌에 맡겨지는데, 그곳에서 갑자기 전염병이 퍼지게 된다. 사람들은 피난을 가게 되고, 상황을 진지하게 판단하지 못한 아이들은 마을에 버려진다.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야 하는 아이들, 어딘가에서 나타난 조선인 소년과 피난민 여자아이, 그리고 탈영 군인. 무시무시한 전염병의 공포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인간애'를 버리지 않는다. 순수한 아이들은 절대 그것을 놓지 않는다.

​  그러나 버려져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살아남으려고 했던 아이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심판'의 장이었다. '절대 어른들이 버리고 떠나지 않았다'는 다짐을 받아내고자 하는 촌장,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이용한 어른들의 회유....... 그들은 말한다. "너 같은 놈들은 어릴 때 비틀어 죽이는 편이 나아, 칠푼이는 어릴 때 해치워야 돼. 우린 농사꾼이야, 나쁜 싹은 애당초 잡아 뽑아버려."다소 특이한 제목이라 볼 수 있지만, 당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상상할 수 없는 이 작품의 제목은 이 대사로부터 큰 의미를 부여받는다. 막 자라나고 있는 새싹, 어린아이들, 또는 아무것도 모르고 남겨진 사람들. 이들은 전쟁의 비참함과 인간의 이기심에 의한 희생자들인 것이다.

 "나는 소년 시절의 기억을 괴로운 것부터 감미로운 것까지 솔직한 형태로 이 소설의 이미지들 안에서 해방 시킬 수 있었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 소설이 가장 행복한 작품이었다고 했다. 아마도 자신이 바꾸고자 하는 세상을, 거리낌 없이 표현해 후련한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는 내용 자체가 어둡긴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작가가 오랫동안 품고 있는 따뜻한 휴머니즘을 숨겨두고 있는 소설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일본 문학의 대가라고만 생각했던 작가에 대한 이미지를 또 다른 면에서 훨씬 좋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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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하고 있는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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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빽빽이 웅크리고 앉은 동료들의 몸 사이로 팔을 내뻗어, 동생의 자그맣고 부드러운 손바닥을 더듬어 찾고는 단단히 거머쥐었다. 가녀린 힘을 주어 되잡는 동생 손가락의 따스함과 더불어, 그 어린 맥박이 다람쥐나 토끼의 그것인 양 나에게 재빠르고 탄력 넘치는 생명감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내 손바닥에서 동생에게로 전달되는 것이기도 할 터였다. 나는 내 입술을 움찔움찔 떨게 만드는 끝없는 불안이 피로와 한데 뒤엉켜 온몸으로 퍼져 나가, 꼭 잡은 그 손에서 동생에게로 흘러드는 것을 염려했는데, 어쩌면 동생도 그것은 마찬가지였으리라. 저항력을 잃은 개처럼 마구 부려져 위험한 운반에 몸을 내맡기고 있는 우리 동료들 모두가 불안감에 입술을 앙다물고 견디고 있었다. (34p)



​그곳은 어둡고, 사람한테 버림받은 숲의 일부를 닮았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생활의 훈훈함이 없고 다만 인간의 냄새가 이미 부패하면서 남아 있을 뿐이었다. 허름한 벽에도, 훤히 드러난 시커먼 대들보 바닥에 깔린 다다미에 기우뚱하니 처박힌 묵직한 가구에도, 우리가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갈 때 집 내부의 모든 구석구석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타인의 눈이 들러붙어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타인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인간이 없었다. 그곳은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았다. (88p)

그리고 우리는 서서히 짙어지는 밤의 새로운 공기와 딱딱한 가루 같은 차가운 안개, 냉랭한 바람 속에서 어느 틈엔가 서로 몸을 바싹 붙이고 팔짱을 끼고, 침묵하는 긴말한 둥근 원이 되어 흙을 밟아 다졌다. 궁지에 몰린 우리들 사이에 굳은 결속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안개는 물론 우리의 닭살 돋은 피부보다도 더 한낮의 희미한 온기를 지닌 땅의 엷은 층 밑에는 어둡고 차가운 눈을 죽은 눈꺼풀로 덮은 사람들, 이미 다리며 가랑이 사이의 은밀한 부분에 구더기가 힘차게 꿈틀거리는 사람들이 팔과 다리를 구부리고 누워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발치에서 날아오르는 새 같은 공포를 일으켰으나 아직은 골짜기 저편, 바리케이드 뒤로 엽총을 그러안고 우리를 거부하는 어른들, 외부의 비열한 어른들보다는 우리에게 더 가까웠다. 밤이 와도 누구 하나 우리를 부르러 죽음의 거리에서 달려 나오는 사람들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입을 꾹 다문 채 참으로 오랫동안 흙을 계속 밟아 다졌다. (115p)

그 전에, 라고 말할 때, 남자는 목소리를 낮추고 모음을 강하게 울렸다. 그것은 그들 마을 사람들이 사건은 이미 완결되어, 전설적인 하나의 이야기, 지나가버린 천재지변 이야기가 되어버렸다고 확신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그 사건을 현실적 시간 속에서 살아내려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에 질질 끌려들어 발목을 붙잡힌 채, 그것과 계속 싸워나가야 하리라. (2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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