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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들의 사생활 - 이승우 장편소설 ㅣ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7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평점 :
『식물들의 사생활』 이승우 / 문학동네
좌절된 사랑의 신화, 그들은 왜 나무가 되려고 했을까

그들은 왜 나무가 되고 싶었을까.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자신을 나무에 투시한 그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마치 나무처럼 사랑을 하던 그들이 바라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남들은 그렇게나 쉬웠던 사랑을, 끝까지 울음을 참아가며 이어갔던 그들의 이야기가 애처로웠다.
내용 자체부터 쉬이 읽어버릴 만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번 감탄하곤 했던 이승우 작가의 소설이었기에 '만만치 않음'을 기대하고서 읽어내렸다. 소설은 사창가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길에서 여자를 태우는 주인공, 그리고 이어지는 회상. 스크린 너머에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 어머니는 다리가 불편한 형을 업고 창녀들이 가득한 '연꽃 시장'으로 들어섰다.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어머니의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채우려 하는 형을, 동생은 원망했고 그를 동물처럼 바라보았다.
그러나 형이 되고 싶었던 것은 동물이 아닌, 식물 그리고 그중에서도 '나무'였다. 그렇게나 행복했던 사랑은 어떤 실수인지 운명일지 모를 함정에 의해 날아가 버리고, 소신껏 행했던 자신의 유일한 작업마저 그를 행복한 인생에서 끌어내리는 동기가 되었다. 역사의 풍파를 직격으로 맞아, 수많은 고문으로 앓게 된 후유증은 그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까지도 드러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형의 인생. 나무가 되고 싶었던 형의 인생에는 알고 보면 또 다른 사람들의 인생이 엮여있었다. 형을 사랑했지만 오해로 인해 여러 세월을 놓쳐버리고 이제 그에게 힘을 주려는 순미, 철없는 사랑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형에게 잊지 못할 아픔을 준 주인공 기현, 담담하지만 필사적인 모성을 보여주었던 어머니, 그리고 그의 오래된 연인. 그들은 이제, 마치 '성소'와도 같은 장소 '남천'에서 만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비극을 어느 정도 되돌려 놓을 수 있는 희망을 제시한다.
작가는 그들의 사랑을 신화에 빗댄다. '나무의 신화', 그들 모두 나무가 되어 형성한 '신화'는 당대의 아픈 역사 속에서 희생된 사랑의 신화이며, 어긋난 관계로 좌절된 사랑의 신화다. 그들은 '나무', 식물이 되기를 꿈꾸면서,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조금씩 변화해간다. 형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이해하면서, 철없던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면서....... 그들은 나무가 되었을 것이다. 서로를 안아주고, 품어주는 나무, 그리고 숲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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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하고 있는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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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끈한 나무줄기가 날씬한 여자의 나신을 연상시켜." 형은 취한 것처럼 말했다. "정말 황홀한 것은 흰 꽃이지. 5월이니까 조금 있으면 꽃이 필 거야.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때죽나무의 흰 꽃들은 은종 같아. 그 아래 서 있으면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리는 것만 같지." 그의 목소리가 깊은 바다에 떨어지는 닻처럼 어두운 숲속으로 유영해들어갔다. 나는 끼어들 수도 없었고, 끼어들 내용도 없었고,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헨젤과 그레텔의 숲을 연상시키는 주술적인 분위기의 검은 숲으로부터 빠져나온 사실만을 고마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47p)
형에 대한 내 감정은 날로 사나워졌다. 그녀에 대한 말 못할 사랑이 간절해질수록 형에 대한 미움도 커졌다. 나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결코 허물이 될 수 없다는 명제에만 편집적으로 집착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은 떳떳하고 자랑스럽고 나아가 바람직한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누구든, 나는 사랑의 보편성에 매달렸다. 하나의 관념, 또는 추상화된 사랑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나 진공상태로 포장되어 있는 사랑이란 없다. 사랑은 언제나 그 사랑이 유발되고 고백되고 실연되는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랑은 상황 안에서의 사랑인 것이다. 모든 사랑이 특별한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그 점을 간과했다. 의도적인 눈감기, 필요가, 혹은 욕망이 어떤 진실에 대해 눈을 감게 하고 새로운 진실을 창출한다. (61p)
그들의 몸은 대칭을 이루며 한 그루의 나무가 되었다. 마치 이제야 완전한 한몸을 찾은 것처럼 그들의 몸은 자연스럽고 아름답고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 어쩌면 지하세계까지 관통하고 있을 한 그루의 야생의 나무가 감정과 감각의 체계를 헝클어놓았기 때문일까, 뻔뻔스럽다거나 혐오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뻔뻔스럽거나 혐오스러운 쪽은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그들은 현실 밖에 있었고, 나는 현실 속에 있었다. 현실 밖의 세계는 정결했고, 현실 안의 세계는 추했다. 온전히 이해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는 뜻이다. 나 자신이 너무나 수치스러워서 더이상 망원경을 눈에 대고 있을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130p)
잘한 일인지 모르겠다. 감추거나 부끄러워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옳은 일이었는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순간의 진실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어떤 책에선가 행동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은 상황이고, 상황 속에 들어 있거나 들어 있지 않은 진실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책에는 동기가 사랑이면 그 행동은 선이다, 하고 쓰여 있었다. 그 문장을 나는, 동기가 사랑이 아니면 그 행동은 선이 아니라는 뜻으로 읽었다. 동기가 사랑이면 아무리 나쁜 행동도 선이고 동기가 사랑이 아니면 아무리 좋은 행동도 선이 아니란 말인가? 하는 의문을 전에는 가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나는 그 상황주의자의 특별한 주장을 정언적인 어떤 명령처럼 받아들였다. 나는 그 상황주의자의 특별한 주장이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받아들였다. 동기가 사랑이라면 모든 것이 용납된다. 사랑은 모든 상황과 문제에 대한 유일한 규범이기 때문이다. (19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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