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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세기
캐런 톰슨 워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기적의 세기』 캐런 톰슨 워커 / 민음사
사소한 기적을 선물해준 시간
'기적'이라고 하면 대개 어마어마한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오거나,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거나 무언가 기이한 일들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기적'이라 말한다. 사소한 뭔가에 '기적'이란 말을 붙이지는 않는다. 그저 그렇게 지내오던 일상에 뭔가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해서 기적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갑자기 꽁돈이 들어왔다 하더라도 기적이라 말하지 않는다. 기적은 우리에게 항상 멀리 있는 것이었다. 뭔가 신비스럽고 상식적으로 떠올리지 못할 상황에서 일어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제목에 '기적'이 있다. 『기적의 세기』 (The Age of Miracle), 놀라운 기적으로 가득 찬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건, 새롭게 변화한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앙'이다.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진 '슬로잉 현상'이 하루의 시간을 거의 두 배 가까이로 늘려가고, 우리 곁에서 똑딱이고 있는 시계 초점과는 정반대의 시간대로 세상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중력이 바뀐 세상은 지구의 모든 것들을 흔들어 놓는다. 새는 날아가지 못해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공을 던지는 스포츠는 불가능해졌다. 중력에 의한 것인지, 사람의 신체도 조금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무기력해지고 피로해지고 가끔 기절을 하기도 하는 '슬로잉 증후군'이 생겼다.
지구에 재앙과 같은 상황이 직면했지만, 이 책의 분위기는 생각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아마도 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춘기 소녀 '줄리아'의 시선이 주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밤과 낮이 뒤엉켜버린 이상한 세상을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은 호들갑 떨지도 않고 침착하다. 소녀는 너무나 크게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 훨씬 작아 보이는 사소한 문제들을 바라본다. 좋아하는 남자아이와의 관계, 그리고 변해버린 부모님의 사이와 가까운 선생님의 모습, 이웃사람들의 행동들...... 『기적의 세기』는 소녀 줄리아의 시선을 통해, 재앙과 같은 '슬로잉'이란 소재는 저기 멀리 둔 채, 그보다 더 작은 기적과 같은 일상들을 주시해나간다. 사람들은 변화된 세상에 맞춰 새로운 시간 개념을 확립하고 자연스럽게 맞추어 살아가기도 하고, 변화를 거부하고 낮과 밤, 그리고 시간이 일치하지 않는 현실을 그대로 살아가기도 한다. 소녀는 그런 조용한 변화를 느끼면서 생각한다. 사람들의 행동은 변해가고 가끔 우연처럼 생기는 일들이 슬로잉 탓인지, 아니면 그냥 삶의 일부일 뿐인지,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기적의 범위는 좁혀진다. 영영 말 한번 못해볼 것 같은 남자친구와의 작은 대화가, 조금은 가까워진 부모님의 사이가, 이전에는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그저 그런 일상 속에서 살아있다는 자체가 기적이 된다. 소녀의 삶에서 그 기적과 같은 시간은 오랫동안 뇌리에 박혀있을 것이다. 나의 기억 속에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도 이런 '기적의 시간'이 있는 것 같아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기적의 세기』는 책 속의 '슬로잉' 현상처럼 아주 미세한 떨림 속에서 느긋하게 진행된다. 무미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이 날리는 듯한 분위기를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을 땐 유난히 그 분위기에 잠식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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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지원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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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새로운 중력의 영향 아래 살게 되었다. 인식하기에는 너무 작은 변화였지만 몸은 벌써 중력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몇 주 동안 하루의 시간이 계속해서 늘어났고, 공을 멀리 차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식축구의 공격수들도 예전처럼 공을 멀리 보내지 못했다. 홈런 타자들은 슬럼프에 빠졌다. 조종사들은 재교육을 받고 비행에 나섰다. 공중에서 물체를 떨어뜨리면 전보다 빨리 땅에 떨어졌다. 돌이켜 보면 슬로잉은 다른 종류의 변화, 이를테면 처음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물체가 떨어지는 속도보다 더 심각한 여러가지 변화를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슬로잉으로 인해 친구 간의 우정이 흔들리거나 연인 사이가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등 미묘한 감정의 행로에 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슬로잉 탓에 내 사춘기가 어땠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내 사춘기는 지극히 평범했고, 내가 느낀 고통은 누구나 경험하는 흔해 빠진 것이었으리라. 우연이란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일들이 겹쳐서 일어나는 경우는 흔하다. 어쩌면 나와 내 가족에게 일어난
그러는 동안 시간은 쉴 새 없이 흘렀다. 손목시계는 계속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할아버지의 골동 시계들은 옛날 종소리로 시간을 알렸다. 미국의 모든 도시에서 교회의 종이 매시 정각에 울렸다. 한 주가 흐르고 두 주가 흘렀다. 우리 집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나는 해나의 전화이기를 바랐다. 아직 해나에게서는 전화가 없었다. 시간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우리의 하루는 삼십 시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루가 이십사 시간이었다는 사실이 아주 낯설게 여겨지기 시작했고, 하루를 호두 껍데기처럼 매끈하게 두 번의 열두 시간으로 딱 잘라 나누는 건 불가능하게 생각되었다. 그토록 단순하게 나눈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의아스러웠다. (105p)
인생을 거꾸로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실망으로 가득한 수십 년을 버텨 낸 후에, 모든 것이 가능하고 타협을 모르는 청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부모님 앞에도 예전에는 빛나는 인생이 펼쳐져 있었으리라. 땅속에 파묻힌 황금처럼 희망이 반쯤 가려져 있었다고 나는 믿고 싶다. 젊은 시절의 두 사람은 어떠한 미래든지 자유롭게 그려 냈을 것이다. 두 사람이 꿈꾼 미래가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전 시절은 원래 다 지나가 버린 허상처럼 느껴지는 법 아닌가?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명목뿐인 말만 남는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발명되고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우리는 마차를 말 앞에 놓지 말라고 계속해서 서로에게 경고한다. 여전히 우리는 백일몽과 악몽을 꾸며, 클락 타임의 이른 아침 시간은 점점 더 현실에서 벗어난 표현이지만 새벽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와 비슷하게 부모님은 사이가 멀어지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서로를 자기라 불렀다. (128p)
"너한테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빠가 천천히 걸으면서 말했다. 가로등이 도로를 밝히고 있었다. 나는 아빠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가 싶어서 약간 겁이 났다. "패러독스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아니?" 아빠는 그렇게 묻고 이마를 쓱쓱 문질렀다. 주위에 줄지어 늘어선 주택들이 검은 하늘에 둥실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르는데요." 당시 파카 소매 속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던 게 기억난다. 아빠와 내 입에서 계속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긴 어둠과 함께 찾아온 추위가 나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패러독스란 언뜻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가 모두 진실인 경우를 뜻해." 아빠는 그렇게 말하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빠의 뒤통수에 조그맣게 머리가 벗겨진 곳이 잇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한 곳이 아니었다. 아빠의 머리는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그것은 흐르는 세월은 막을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 중의 증거였다.
"그 말을 잊지마, 알았지? 인생에는 흑백으로 나뉘지 않는 것도 있어." (3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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