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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의 역사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4년 9월
평점 :
『풍의 역사』 최민석 / 민음사
허구와 진실이 뒤섞인 이야기가 어떻게 삶이 되는가
주인공 이풍, 바람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주인공은 태어났을 때부터 비범했으며, 질풍노도의 연애사 또한 독특했으며, 근현대사에 속한 우리 역사의 큰 줄기란 큰 줄기는 모두 겪어낸 엄청난 사나이다. 『풍의 역사』, 그의 일대기는 하나 건너 그의 손자에 의해, 구라와 진실이 뒤섞이며 마침내 많은 이들로부터 '허풍' 이란 우스갯소리로 불렸던 이유를 드러내며 전해진다. (그의 아들은 '허구', 또 그의 아들은 '허언'으로 불린다. 삼대에 이어지는 허풍의 인생들이다)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도 가지가지, 어떤 의도가 없음에도 오해를 받고, 사실상 어느 정도 자기 앞가림을 할 줄 아는 빠릿빠릿한 사나이였지만 빵빵 터지는 사건들 속에서 '이풍'은 역시나 그의 이름처럼 (자유롭진 않게) 우연과 같이 휩쓸리고 휩쓸린다.
'입담'으로 유명한 작가답게 『풍의 역사』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를 주목시키는 판소리의 변사처럼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소설은 무척이나 가볍고 유쾌하다. 간혹 다른 작품들과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부분도 있는데, 현대사라는 팩션과 픽션이 맛깔스럽게 어우러진 면에서는 『차남들의 세계사』(이기호)가, 우연처럼 역사의 큰 굴곡을 찍고 큰 역할을 하는 면에서는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요나스 요나손)이, 이야기를 전해주는 방식으로서는 또 하나 유명한 입담꾼 중 하나인 천명관의 작품들이, 이 재밌는 이야기 속에 숨겨진 교훈은 마치 『큰 물고기』(영화 <빅 피쉬>)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역시나 한국의 역사가 맛깔스럽게 버무려진 이 작품 또한 어떤 작품에 지지 않게 내 입맛에 쏙 들어맞았다.
그 비슷한 느낌의 작품들 가운데 서서 『풍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허구'와 '진실'에 초점을 맞춘다. "그저 개인의 삶을 충실히 살았을 뿐"이라고 얘기하는 할아버지 '풍'의 역사가 어떻게 『풍의 역사』라는 이야기가 되는지. 살아가면서 허풍과 가벼움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주인공이 들려주는 그의 역사는 '믿거나 말거나'지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허풍'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선사하는지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똘똘 뭉친 이야기의 힘은, 작가가 소설을 바라보는 시각과도 이어진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사실상 구라를 잘 치는 사람들이 많은 이들을 매혹시키는 소설가가 되는 거라는 믿음도 들고. - 아쉽게도 전작을 읽어보지 못했으나, 어깨너머로 들은 그의 작품들은 독특하고 유머러스하다고 하니, 『풍의 역사』와도 비슷할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자유롭게 노닐고 싶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이자, 삶이 평범하지는 않던 삼대의 과거와 현재이자, 현대사의 질곡을 넘나든 역사다. 그 역사는 허풍과 진실이 마구 뒤섞여있지만, 어디까지 믿는지는 자유다. 주인공 '풍'의 한마디가 보탬이 될지도 모르겠다.
"삶에는 언제나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순간 비로소 진실이 되는 게 있단다"
『풍의 역사』 속에는 재치 넘치는 이야기와 유머스러운 문체 속에 웃고 넘기지 않을 진지한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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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지원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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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 풍이란 인간은 어찌 되었기에 여섯 살부터 백 살까지 오해하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정리하자면 이렇다. 일단 풍은 당시 열 살이 맞았다. 그러나 그의 미소는 여섯 살이 아니라, 갓 태어난 아기라 해도 무리 없을 만큼 해맑았다. 그랬기에 여섯 살 금순이의 마음을 깨뜨리기에 장애가 없었다. 동시에 풍의 체구는 거인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열 살 때 이미 청년의 체구를 띠고 있었다. 그랬기에 서른 살 과부 정씨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든 것이다. 아울러, 풍은 심정에 따라 표정을 바꾸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치 가면을 바꿔 쓰듯 얼굴을 바꿔 썼다. (22p)
풍은 전투모 안에 `밤`의 사진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살아야 했던 이유이자, 이 전쟁을 이겨 내야 하는 이유였다. 풍은 미군과 싸운 것도 아니고, 일본군과 싸운 것도 아니고, 전쟁 자체와 싸우고 있었다.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 그래서 다시 중도로 돌아가 밤을 지켜내는 것, 그것이 그에게는 가장 절실한 생존의 이유이자 목표였다. 그리고 이 평범한 한 인간의 절실한 희망은 세계대전이라는 광포한 역사의 억압을 기어코 이겨 내고 말았다. 누구는 우연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거짓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풍은 언제나 신이 이 땅에 자신을 보냈기 때문에 신은 단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항상 자신을 도우려 했다고 말했다. 그게 다소 허무맹랑할지라도 말이다. (46p)
여기서 잠깐 말을 보태자면,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풍에게는 이처럼 느끼한 면이 다소 있었는데, 당시의 맥락에서는 이게 그렇게도 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당시의 여자였던 밤은 이 말에 그만 껌뻑 죽어, 넘어갈 듯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풍에게 "몰라, 몰라. 개복치야"라며 가슴을 마구 두드리며 선보일 수 있는 갖은 애교를 맘껏 터뜨렸다. 근데 어찌나 기분이 좋아 마구 두드렸던지 애교라 생각하며 주먹질을 받아 냈던 풍도 그만 통증에 기침을 뱉고야 말았다. 그제야 밤은 너무했나 싶어 걱정하며 물었다.
- 어머! 자기, 괜찮은 거야? 풍은 이 사랑의 염려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답했다. - 괜찮다. 이따위 통증. 아프니까 청춘이다. (61p)
풍은 이때 자신의 인생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디선가 불어오는 힘의 바람에 의해 떠다녀야 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왜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담보로 거리에서 자신의 소리를 외쳐야 하는 지, 왜 힘없는 사람들이 벼랑 끝에 몰려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세상이 반응하는지, 왜 세상은 반응하는 자신들의 감정을 속으로 삼키는지, 왜 권력자들은 세상의 목소리를 외면하면서도 그 생을 유지하는지....... 풍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소리 없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그림 같았다. 햇살은 따갑게 눈을 찔렀고, 땅에는 붉은 개울이 흘렀다. 그 붉은 개울을 디딘 사람들의 살아가는 발자국이 이 세계에 애달프게 남겨졌다. 땅에는 붉은 개울이 흘렀고, 공기 중에는 붉은 꽃이 피어났다. (15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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