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탐닉 - 신이현의 열대를 보내는 다섯 가지 방법
신이현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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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탐닉』 신이현 / 이야기가 있는집

 열대의 묘한 향기와 열기가 느껴지는듯

 

 

 

  젊었을 때의 여행, 식도락 여행, 고생을 사서 하는 여행, 풍족한 휴식을 떠나기 위한 여행. 그 어떤 것이라도 '참 여행'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서 가장 해보고 싶은 여행은 '사람을 만나는 여행'이다. 여태껏 내가 한, 새로운 곳을 보고 만나는 여행은 늘 익숙한 사람과 함께였기에 거리감이나 두근거리는 설렘보다는, 친숙하고 편안한 여행을 했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는 여행을 꼭 해보고 싶기도 하다. 낯을 퍽 가리는 성격상 내게는 큰 도전이 필요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의 여행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여행 동안 소중한 벗이나 특별한 사람을 만났다고 하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조금은 부럽다. 외지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언어가 완벽히 통하지는 않지만 어색한 몸짓으로 소통하고, 낯설지만 따뜻한 미소와 도움을 주고받는 '사람 여행', 언젠가는 가능할까?

 

 

  『열대탐닉』을 읽으니, 그 바람이 더욱 짙어진다. 무덥고 끈적끈적하고 늘어진 캄보디아의 열기를 듬뿍 담아온 여행 에세이. 여행 에세이라면 뭔가 특별하고 외진 곳의 이야기를 담아낼 것 같지만 이 책의 시작과 끝은 '호텔 수영장'이다. 뭔가, 여행보다는 관광에 가까운 장소지만, '사람'에 대해서 관찰하기 위해서라면, 이곳도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뿜어낼 장소이기도 하다. 신이현 작가는 이곳에서 처음 만난, 열대에 탐닉한 다섯 인물에 관한 에피소드를 털어놓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저자 신이현은 전해준다. 건기와 우기가 반복되는 먼지 냄새와 땀 냄새, 묘한 열기와 향기가 섞여있던 열대에 제대로 젖어 있던 그들의 기분을, 그때의 감성을. 전해지는 글들은, 멀리 떨어진 나도 무르익은 분위기에 푹 빠져들 만큼 속삭이고 또 속삭인다. - 어찌 다들 이렇게 아름답게 얘기할 수 있는지, 저자가 혹 열대의 감성에 젖어 그들의 말을 무척이나 아름답게 변형시킨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

 

 

 

  그러나 이 책의 특별함은 끝나지 않았으니, 열대의 뜨거운 무더위 속에서 풍겨오던 향기의 과일, 갈증을 풀어주던 과일들에 그 사람들을 빗댄다. 시시껄렁하고 낙천적이었으며 누구보다도 그곳을 탐닉했던 '잭 프루트', 몽롱한 망고의 향을 풍겼던 자유로운 '망고 아저씨', 로맨틱한지 과하게 자유분방한 건지 남다른 비밀이 있었던 '두리안', 늘 미소를 짓고 있었던 '불꽃씨', 마지막으로 파파야에 비유했던 저자 신이현의 이야기까지.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열대에서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상야릇한 과일들을 먹으면서 이상야릇한 생각을 했다고.” 『열대탐닉』은 그 곳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들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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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의 술집에서는 어디를 가든 맥주잔에 얼음을 넣어 주었다. 아가씨들이 얼음통을 들고 다니다 맥주잔에 얼음이 녹으면 재빨리 얼음덩이를 넣어주는 식이었다. 맥주는 점점 연해져서 보리 주스처럼 되어 버렸다. 나는 얼음이 든 맥주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결국 좋아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얼음 없는 맥주가 나오면 불평을 했다. 얼음으로 연해져 버린 맥주는 오래 마실 수 있었고 취하지도 않았다. 열대 시간에 맞춘 술 마시기의 방법이었다. 밀도가 낮은 맥주를 마시다 보면 인생의 밀도도 낮아졌다. 모든 것이 느슨해졌다.

무엇인가를 결심하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결국 터특하고 가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염없이 열대의 태양 아래 누워 있었다. 그렇게 누워 맨살을 말리면 그 끝에 찾아오는 것이 있었다. 갈증이었다. 입이 바싹 타고 온 몸의 세포가 말라붙었다. 맥주를 마셔야 하는 시간이었다. 얼음이 출렁거리고 유리잔에는 물방울이 툭툭 흘러내리는 맥주를 마시는 순간 나는 인생에서 누려야 하는 것이 압축적으로 내 입안으로 흘러들고 있음을 느꼈다. 열대의 태양 아래 갈증이 나도록 몸을 태운 뒤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것, 쾌감의 절정

"여기 뭐가 좋아요?"

"이 도시는 잘난 체하지 않아."

"잘난 게 있어야죠."

"잘난 게 없는 이 도시가 좋아."

그는 이제 곧 직업을 갖게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놀라는 나를 보더니 음흉하게 웃으며 테라스 끝으로 갔다. 드리워진 난들을 옆으로 헤치고 골목길 어딘가를 가리켰다. 지저분한 벽 앞에 한 남자가 의자에 앉아 해맑은 모습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숫돌이 앞에 놓인 것으로 보아 칼 가는 남자였다.

"저기가 곧 내 자리가 될 거야." (93p)

"그 남자를 다시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여기서 먼 고대 절에서였어요. 초등 동창생들이랑 여행 왔을 때였죠. 고대 돌무더기들 사이를 돌아다니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였어요. 다들 더위에 지쳐 호텔 수영장에 누워 있었죠. 그런 호사스러운 휴식이 우리에게는 무척 어색했어요. 그때 이렇게 노을이 지더군요. 풀벌레 소리 같은 건 없었어요. 도마뱀이 울었죠. 그 소리 들어봤죠? 짝을 찾는 소리라고 하더군요.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노을이 수영장 물을 건너 나에게 왔을 때 손가락 끝의 세포가 깨어나는 것을 느꼈어요. 노을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이곳의 노을은 특별했어요. 몸이 나른해지면서 슬픔이 복받쳐 올랐어요. 목덜미에 무엇인가가 느껴졌어요. 잡으려고 하니까 아무것도 없었어요. 목덜미를 타고 내려온 노을은 내 온몸으로 내려오면서 황홀하게 나를 감쌌죠. 그래요, 바로 누군가의 손길이었어요. 붉은 열대의 공기는 내 몸을 어루만지던 어떤 남자의 손길을 떠올리게 했어요. 이곳 공기 속에는 본능을 일깨우는 무엇인가가 있어요. 맥박이 조금씩 빨라지고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입술이 벌어졌죠. 그래요, 노을

"내 나이 열 살 때 아버지가 기타를 사주었죠. 그런데 그 다음 날 아버지가 사라졌어요. 대체 아버진 어디로 갔을까요? 집으로 오던 빙판길에 미끄러져서 우주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것일까요?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난 그때부터 기타를 쳤죠. 언젠가 유명한 기타리스트가 되었을 때 아버지가 돌아오리라. 하지만 돌아오지 않았어요.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기타를 그만두었어요. 그리고 처음 만져 봅니다. 이 기타 줄....... 생각해 보니 지금 내가 그때 아버지 나이가 되었네요. 아마도 아버지는 이 곳에 있지 않을 까요? 아마도 이곳에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이 기타가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일까요?"

그의 목소리는 기타 소리와 함께 우주 공간의 별들처럼 빙빙 돌아갔다. 그는 기타리스트일 뿐만 아니라 시인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솔직히 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언어로 듣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갔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나의 상상력으로 완벽하게 채웠다. 공백으로 된 그 시의 반을 풀어내는 것은 나의 기쁨이었다. (1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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