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과 창조의 시간 밀리언셀러 클럽 135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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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과 창조의 시간』 로렌스 블록 / 황금가지

지지부진하게 끌지 않아 딱 좋았던 이 소설

 

 

 

 
 현재까지 단편을 포함해 18권의 책이 출간되었다는 로렌스 블록의 '매튜 스커더 시리즈'. 작가의 이름이 내겐 생소했지만, 많은 수상 경력으로 추리 작가 협회에서는 아주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시리즈를 쭉 살펴보면 일단, 내용은 제쳐두고라도 제목이 꽤 세련되었다고 느껴지는데, 『살인과 창조의 시간』이란 작품도 70년대 후반에 처음 출간되었다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로 매끈하고 세련된 소설이다. (이 사실을 모르고 책을 읽었는데, 정말 놀랐다.)
  추리 장르를 비롯하여 많은 소설들이 누구나 상상할 수 있을 정도의 평범한 주인공을 들고 나오지는 않지만, 이 시리즈의 주인공 '매튜 스커더'는 자못 특별한 캐릭터인 것 같았다. 경찰직을 그만두고 사립 탐정으로 일하게 된 점에서는 거의 비슷한 전개이긴 하다. 하지만 일을 할 때 진지하고 냉철하면서도 약간은 우울하고 약한 면이 있고,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는 약점이 있어 '살인' 자체를 싫어하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잘못을 되묻고, 술에도 많은 부분 의존하며, 사건을 해결하면서 생기는 안좋은 상황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스커더'라는 사람에게 왠지 자꾸만 정이 갔다. 뭔가 사람 냄새나는 캐릭터랄까. 보통 장르 소설을 읽을 때 재미와 이야기 전개에 집중하곤 하지만, 캐릭터에 대해서 꽤 많은 관심을 보인 건 나에게도 드문 일이었다.
  이야기 자체도 특이한 편인 것 같았다. 누군가의 비밀을 이용해서 공갈 범죄를 일으켰던 '스피너'가 언젠가 했던 부탁 - 만약의 사태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달라는 -을 통해 편지를 받게 되고, 그의 죽음과 동시에 스커더는 복수를 대신하게 된다. '스피너'의 사연은 일단 뒤로하고, 공갈범의 복수를 사립탐정이 대신 한다니, 놀랍다! 물론 복수는 '피'의 복수가 아닌, 사실을 캐내는 복수였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이야기에, 이 작품 꽤 신선하게 여겨졌다.
  생각보다 얇은 책 두께에 조금은 예상했지만, 지지부진하게 이야기를 끌고 끄는 것이 없어서 참 좋았다. 과한 떡밥을 늘어놓는 경우에 마지막이 조금 과해지는 소설도 있지만, 『살인과 창조의 시간』은 딱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만 깔끔하게 떨어지니, 읽는 데는 부담이 없어 한숨에 읽을 수 있다. 현재까지 나와있는 '매튜 스커더'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이 어떤 면에서 이 소설과 연결되고 묶여질지, 비슷한 느낌일지 기대가 된다. 다음에 읽을 작품은 『어둠 속의 일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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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지원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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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갈범은 보험이 필요하다. 피해자가 공갈범을 죽여서 협박을 끝내지 못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누군가 (변호사, 여자 친구, 누구든)가 희생자를 애초에 불안하게 만든 증거를 쥐고 배후에 앉아 있어야 한다. 공갈범이 죽으면, 증거는 경찰에게 가고, 스캔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다. 모든 공갈범들은 으레 피해자에게 이 추가된 요소를 알린다. 가끔은 공범도 없고, 경찰에 보낼 봉투가 없는 경우가 있다. 배후에 숨어 있는 증거가 그 사건의 관련 당사자 모두에게 위험하기 때문에 공갈범은 그냥 그런 증거가 있다고 `말`만 하고 피해자가 감히 그 증거를 보자고 요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공갈범의 말을 믿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31p)

네 번째 봉투에 자네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게 자네 거야. 안에 3000달러가 들어 있는데 자네 몫이야. 더 넣어야 하는 건지, 거기에 얼마를 넣어야 하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어. 자네가 그냥 그 돈만 챙기고 입 닦아 버릴 수도 있겠지.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난 죽었을 테니까 모를 거야. 왜 자네가 이 일을 끝낼 거라고 생각했냐면 자네에 대해 아주 오래전에 눈치 챈 점이 있어서야. 자네가 살인과 다른 범죄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어. 나도 그래. 난 평생 나쁜 짓을 하며 살아왔지만 한 번도 남을 죽인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거야. 난 확실히 혹은 소문에 듣기에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을 알고 있는데 그들과는 결코 가깝게 지내지 않아. 나란 사람이 원래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자네도 그런 사람이야. 그래서 자네가 뭔가 해 줄 거라고 생각했어. 다시 말하지만 자네가 그러지 않아도 난 그 사실을 모를걸세. (35p)

독한 술을 한 잔 따라서 마셨다. 잠시 손의 떨림이 배 속까지 전달돼서 위스키가 넘어올 것 같았지만, 이내 가라앉았다. 나는 종이 한 장에 글자 몇 개와 숫자들을 적어서 지갑에 넣었다. 그리고 옷을 다 벗고 샤워기 밑에 서서 온몸을 적신 땀을 씻어 내렸다. 기진해서, 그리고 동물적인 공포에서 솟아난 식은땀이었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받고 싶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단지 경고였어, 스커더."

"개소리, 넌 날 해치우려고 했지만 실력이 모자랐던 것뿐이야."

"우리는 마음먹은 건 놓치지 않아." (112p)

"살인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 당신은 인간의 생명이 신성하다고 믿고 있군요."

"내가 생명이든 뭐든 신성하다고 믿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아주 복잡한 질문입니다. 나도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한 명을 죽였어요. 불과 얼마전에도 한 사람이 나로 인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가 의도했던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아지진 않더군요. 인간의 생명이 신성한지는 모르겠습니다. 난 그저 살인이 맘에 들지 않을 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살인을 저지르고도 빠져나가는 와중에 있습니다. 그 점이 내 맘에 걸립니다. 그 점에 대해 내가 하게 될 일이 한 가지 있는 겁니다. 난 당신을 죽이고 싶지도 않고, 당신의 정체를 노출시키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 일들은 하나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불완전한 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건 이제 진력이 났습니다." (2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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