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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전설
데이비드 밴 지음, 조영학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자살의 전설』 데이비드 밴 / 아르테
아버지에 대한 고백과 물음, 회고록 혹은 속죄의 일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그중에는 글쓰기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사실, 그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일 수 있다. 자신의 가슴에 박힌 총알을, 그대로 두지 않고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면서 천천히 빼내는 것이다. 고통은 있을지라도, 상처가 아물면서 점점 아픔이 잦아든다. 마음의 상처도 그러할 것이다. 자신의 아픔을 온전히 보고, 아픔의 이유를 파악하고, 아픔을 그저 묻어두는 것 대신에 천천히 뽑아내는 것이다. 작가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접했다. 사고가 아닌, 자살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것보다 더 슬펐던 건, 부모님의 이혼 후 아버지가 알래스카에서 함께 살자는 권유를 어린 그가 거절했던 것이었다. 아버지가 싫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 환경과 삶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는데, 죄의식은 크게 가슴속에 남았다.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았고, 작가는 그 이후 수많은 물음들을 던졌을 것이다.
"만약 그때 아버지의 권유를 수락하고 알래스카에 살았더라면?" 작가의 생애 가장 많이 되물었을 법한 질문이고 자책이었을 듯하다. 작가는 '수콴 섬'이라는 중편에 그 질문을 풀어낸다. (책 속에는 다섯 편의 단편이 있고, 지금 언급했던 '수콴 섬'이라는 중편이 있다.) 책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가장 많은 감정을 풀어내린 소설이었던 것 같았다. 작가는 '수콴 섬'에, 그의 마음속을 지배하고 있는 어두운 죄책감을 씻어내린다. 아버지가 '자살할 용기'마저 없었던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어찌 됐든 삶을 이어가려고 노력했더라면 하는 바람이, 밤새 울부짖었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 더 헤아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차라리 내가 당신을 구하고 죽었더라면." 하는 무모한 바람마저 담겨있었다.
책을 읽고 웬만해서야 눈물을 흘리지 않지만, 작가의 말까지 읽고 나니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된 이후로 수많은 세월이 흘렀겠지만, 그의 삶과, 또 아버지의 삶을 고스란히 풀어낸 이 자전적 소설에 그 또한 마음이 꽤 풀렸으리라. (그랬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책 속에 있던, "깨달음이란 왜 늦기만 한지."라는 말처럼, 아버지가 그를 사랑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아버지를 그만큼이나 사랑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꽤 일찍 깨달은 셈이다. 수많은 세월을 지나고서도 맘속에 후회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허다할 테니까. 어찌 됐든 수많은 아픔이 있었겠지만 그는 온전히 한 권의 책을 만들어냈다. 일종의 회고록이자, 속죄의 일기이자, 이제는 대답할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고백과 물음인 『자살의 전설』을.
책은 마치 장편 같은 느낌이지만 『자살의 전설』에 담겨있는 각 부제의 글들은 일종의 연관성은 있으면서 각각 다르다는 느낌을 가지고 읽어야 할 것이다. 차례대로 읽다 보면, 잠시 멈칫할 수 있으니. 그 글들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앞에서 말했던 '수콴 섬'이며, 그를 통해 각 이야기들이 서로 엮여있는 듯하다. 독특한 구성에 놀랄 수도 있지만, 하나같이 신비롭고 축축한 분위기에 빠져들어 이야기 속을 걷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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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지원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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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잠시 얘기를 끊었다. 그래서요? 로이가 물었다. 세월이 자니면서 마침내 변두리들끼리 부딪치기 시작했다. 서로 꿈틀거리며 몰려들어 지구를 만들었는데 그때의 충격 때문에 이 땅은 자전과 공전을 시작하고 인간과 야수는 더 이상 떨어져 나가지 않았어.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보기 시작했지. 털도 없는데다 새끼들까지 쥐며느리처럼 못생겼기에 결국 뿔뿔이 흩어져 서로를 학살하고 좀 더 그럴듯한 짐승의 가죽을 입기 시작했어. 하, 그래서요? 로이가 다시 물었다. 그 이후로는 너무 복잡해서 도저히 설명하기가 어렵구나. 어딘가에는 죄가 있었고, 이혼이 있었고, 돈이 있었고, 국세청도 있었지. 그리고 죄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거야. 아버지하고 엄마하고 결혼했을 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아버지가 아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분명 로이가 민감한 문제를 건드렸다는 시선이었다. 아니, 그 이전일 거야. 아무튼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56p, 수콴 섬)
그 후 이틀 동안 비가 내렸다. 두 사람은 지붕과 통로 문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었다. 나무는 세로로 자르고 손도끼로 가지도 쳐냈다. 로이는 일을 하는 동안 아버지의 얼굴과 더부룩한 수염을 지켜보았다. 코끝에서 차가운 비가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돌에 새긴 조각만큼이나 딱딱해 보였다. 생각도 쇠심줄만큼이나 질겼다. 지금의 아버지와 또 다른 아버지, 그러니까 툭하면 울고 절망에 빠지고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아버지는 도저히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없었다. 물론 두 아버지를 모두 알기는 하지만 어떤 순간 어느 아버지와 함께 있든, 오로지 그 순간의 아버지일 뿐이다. 순서가 되면 다른 아버지는 불에 타 완전히 소멸해버리는 것만 같았다. (133p, 수콴 섬)
지금 사는 사람들이 우리 가족을 기억해 나를 안으로 들이기는 했지만 이제 이곳에 추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껏 퀴퀴한 연기, 애완동물, 음식 아이들의 낯선 얼룩, 바닥 여기저기 널브러진 통조림과 옷가지들뿐이었다. 뒷마당 벚나무는 그대로였다. 기억으로는 아주아주 키가 커서 그곳에 올라가 숨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3~4미터 높이의 평범한 나무로, 가냘픈 데다 매력도 없었다. 키큰 울타리는 기껏 내 허리 높이에 불과했다. 기억이란 실제보다 아주아주 풍요롭다. 과거로의 회상은 기억 자체로부터 기억 하나를 덜어낼 뿐이다. 기억이 삶 또는 자아를 세우는 기반인 한, 귀향은 삶과 자아를 제거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27p, 캐치칸)
우리가 아버지한테 관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란 사내가 다다라야 하 고지가 아닌가. 냉혹하다고 할지는 몰라도 솔직히 그럴 의도는 없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내 미래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 또한 재능이다. 꼭 축복일 수야 없겠지만. (303p, 높고 푸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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