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사물들 - 시인의 마음에 비친 내밀한 이야기들
강정 외 지음, 허정 사진 / 한겨레출판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시인의 사물들』 강정, 권혁웅 외 / 한겨레출판

이야기를 만드는 특별하고 내밀한 사물들

 

 

  

  누구나 그렇듯이 내 장래희망도 어릴 때부터 참 많이 바뀌었다. 학교에서 나눠준 종이에 별 의미 없이 적은 것들도 있었고, 그리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한 활동에도 큰 뿌듯함을 얻어 바로 장래희망으로 직결시킨 것들도 있었다. 내가 유난히 더 되짚어 기억하는 것은 지금 내가 읽고 쓰는데 동기 부여를 해주는 (종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썼던) '작가'라는 꿈과 초등학교 때 한 번인가 종이에 썼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꿈이다. 후자는 아마, 평생 이루지 못하고 사라질 꿈이기 때문에 (물론 굳이 피 나는 노력을 하여 이루고 싶지는 않은 꿈이기 때문에) 왠지 아련하고 잊지 못할 추억이기도 하다.

  악기 하나는 꼭 배우게 했던 엄마들의 노력 탓에, 울며 겨자 먹기로 피아노를 배웠던 기억이 난다. 연습을 안 하고 실수 연발에 다그치던 과외 선생님은 너무나 싫었다. 글쎄, 피아노에 대한 흥미가 별로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남들과는 다른 것을 배우고 싶었다. 남들 다 치는 피아노 말고, 뭔가 특별한 것.

 그 바람이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 이루어졌던 것 같다. '특기 적성'시간에 내 손에 들어오게 된 싸구려 바이올린. 작은 몸에 맞춰 나온 연습용 바이올린이었지만 내 눈에 그 특이한 악기는 번쩍번쩍 윤이 났다. 말꼬리로 만든 활에 송진을 마구 비벼서 바이올린 줄에 그으면 야릇한 소리가 났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줄의 다른 곳을 누르고, 활을 그으면 소리가 달라졌다. 줄에 누른 손가락을 떨어 음을 더욱 멋지게 내는 선생님의 음악과는 다르게, 나와 내 친구들의 소리는 굉장히 밋밋했지만, 간단한 음으로 이루어진 음악들을 - 아마도 미뉴에트일 것을 - 신나게 연주했다. 그리고 어찌 된 이유인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2년도 채 되지 않게 연주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특별한 추억을 상기시키는 사물들이 있다. 지금은 사라진 시대의 사물들, 그리고 조금씩 변형되어 다른 이름으로 자리 잡게 된 사물들....... 그리고 나의 사물들 중 하나는 아직도 우리 집 창고 속에 줄이 끊어진 채로 있는 '바이올린'이다. 그 사물들을 보고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옛날 생각'을 하는 건 언제나 정겹다. 심지어 남의 이야기까지도 정겹다. 시인들의 특별하고 내밀한 추억들이 담긴 『시인의 사물들』이 유독 내 마음에 다가온 것은 '시인'들의 멋진 문장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감성을 투영한 '사물들'이 내게도 정겹게 다가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언젠가 그 독특함에 굳이 구매하고 싶어 안달을 했던 '타자기', 그리고 내게도 특별한 물건인 '카메라',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카세트테이프' 같은 사물들이 다양한 주제 안에서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담은채 이야기된다. '살다, 삶', '보다, 시선', '열다, 세계', '쌓다, 축적', '원하다, 욕망'의 주제로 묶인 이 사물들이, 내가 항상 부러워 하던 시인의 '우월한' 시선을 만났다. 이 책을 읽고 나의 사물들과 다른 사람들의 사물들을 엮어보고 싶어졌다. 시인들의 독특한 시선으로 능수능란한 글이 나오지는 못하겠지만, 누구에게나 특별한 추억을 담은 것들은 있을 것이기에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의 사물들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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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지원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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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수다한 흔적과 파편과 그로 인한 미세한 파문들의 반향을 꼼꼼히 관찰하는 일. 그건 결국 내가 대하는 세계와 인간의 심리적, 정신적 점막들을 살펴 헤아리는 일이 된다. 그때 돋보기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익히 알다시피 돋보기로 빛을 흑점에 모아 열기를 투과시키면 뭔가를 불태울 수도 있다. 나는 어쩌면 태양을 정면으로 받으며 서서 뭔가를 태우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모른다. 살면서 놓쳐버린 것들, 저질렀던 과오들, 화를 돋우고 심신을 절망케 하는 그 모든 허구의 뒷담화 따위를.

돋보기가 돌연 무섭다. (17p, 돋보기 - 강정)

찌는 수직으로 솟고 그 자세 그대로 가라앉는다. 흐트러짐이 없다. 선방 수좌처럼 늘 꼿꼿한 허리를 세우고 있는 찌 위에 꿈과 후회와 웬수 같은 기억들을 올리고 되잖은 양심 같은 것들도 올려본다. 그래도 선명한 빨강의 찌 끝, 찌톱을 수면에 살짝 드러낸 직립의 자세는 무너지는 법이 없다. 때로 그 무겁다는 연애와 돈 따위를 올려도 마찬가지다.밤이 왔다. 찌톱에 케미라이트를 꽂아 불을 밝힌다. 파란 찌불은 수면에 별처럼 떠서 깜빡거린다. 이제 머잖아 어신이 올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밤새도록 한 번도 오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쁜 애인을 보듯 찌를 본다. 어, 그런데 어쩐 일인가? 거기 유체 이탈이래도 한 듯 내가, 당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온갖 것들이 서 있는 게 아닌가? 나날이 힘겨워지는 밥벌이며 보살펴야 할 가족이며 의무들을 추처럼 달고서는, 훨훨 어디 다른 곳으로 다른 것이 되어 날아가고 싶은 욕망을 팽팽히 견디면서는, 깊디깊은 제각기의 삶 속에, 줄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직립의 자세로. (48p, 찌 - 전동균)

무엇이든, 마지막 하나만 남았을 때의 불안감을 나는 알고 있다. 빨래를 하지 않아 옷장 속에 한 장만 남아 있는 속옷이라든가, 정류장까지 죽도록 뛰어야 탈 수 있는 한 대 뿐인 막차라든가. 이제야 배가 좀 채워지는구나 싶은데 딱 한 숟갈만 남은 뜨끈한 밥이라든가, 하나만 더 있었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 테고 하나가 더 필요하므로 불만인 무엇들.둘이 남았을 때는 모르다가 하나만 사라졌는데도 보이는 다른 하나의 커다란 공백. 이 '마지막'과 '하나' 사이에 놓인 긴장감이 싫어서, 또 긴장감이 불러오는 상상이 귀찮아서 우리는 늘 미래를 준비한다. 그러나 길을 물어보기 위해 뒤에서 어깨를 두드리는 타인의 차가운 손처럼, 모든 '마지막 하나'는 불현듯 찾아오는 법이다. (84p, 성냥 - 정영효)

바깥에서 밥을 먹으면 식후 커피까지 합하여 거의 만 원 가까운 돈이 빠져나간다. 사랑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에 싸는 도시락인가? 농담도 걸어보지만, 도시락에는 농담이 별로 없다. 거기에는 삶의 무게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대체로 슬픔의 맛이다. 도시락에는 만 원에 비할 수 없는 누군가의 손가락이 묻어 있을 것이다. 역시,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그냥, 도시락처럼 얌전히만 살고 싶은데. 내일도 도시락처럼 담겨 우리는 출근을 하겠지만, 되도록 슬프지는 않기로 한다. 입에 넣어 오래 씹으면 찬 반찬도 결국 고유한 맛을 낸다. 모든 맛에는 슬플 틈이 없다. 도시락은 그런 것이다. (175p, 도시락 - 서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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