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년의 밤』 정유정 / 은행나무

 운명이 난데없이 변화구를 던진 밤

 

 

 

 

 

  ​엄청나게 인기를 끌거나 제목 하나만으로 열풍이 돼버린 책들은 그 열풍이 사그라지기 전에 읽는 것을 피하곤 한다. 무슨 건방진 배짱이냐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이 "읽지 말자"고 생각하기 전에 손이 잘 안 가는 걸 어쩌랴. 여기저기서 불러지는 제목들이 기대감을 증폭시켜서 반대로 작품을 읽을 때는 재미가 급격히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평 또한 쓰기 굉장히 어려워진다.) "역시 정말 좋았어요." 하는 경우라면 다행이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사실 두려움 때문에 시도조차 안 해봤지만 말이다. 약간은 재수 없는 강박관념일지 모르겠고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규칙, 혹은 몹쓸 버릇일지도.

  <7년의 밤> 역시 제목을 알고 난 뒤 3년이나 끌었다. 박범신 작가는 정유정 작가에게 '괴물 같은'이라는 표현을 썼다.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말 그대로 괴물 같은 소설이었다. "운명이 난데없이 변화구를 던진 밤" 7년의 시간을 끊임없이 행진하게 만든 오싹한 그날의 밤을, 주인공과 우리 모두 목격한 채 어두컴컴한 곳으로 달아나고 또 잡힐 것 같으면서도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사이코패스 같던 오영제의 '교정'을 상상하고 두려워하면서, 어렸을 적 트라우마를 안고 살았던, 그날 밤 자신의 내부에서 손쓸 엄두도 없이 빠져나왔던 최현수의 제2의 손과 심리적인 변화를 두려워하면서. 겉으로 보이는 선 그러나 속에 깔린 악, 그 속에 숨겨진 진실을 궁금해하면서.

  친절하게도 작가는 마지막 부분에 소설의 키워드를 제시해주었다. "사실과 진실 사이에는 바로 이 '그러나'가 있다고. (...) 우리는 모두 '그러나'를 피해 갈 수 없는 존재기 때문이라고." 사실과 진실은 어떻게 보면 유사한 단어로 보인다. 쉽게 말하자면 사실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 혹은 현상, 진실은 Truth 왜곡되지 않은 '참'이다. 사실에 가려 잘 보지 못하는 것이 '진실'이고, 알면 위험할 수도 불편할 수도 없는 것이 '진실'이다. 때로는 아주 작은 뜻밖의 상황이 엄청난 왜곡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누군가의 주관적인 생각이 진실을 가려버릴 수도 있다. <7년의 밤> 소설 속에서 수많은 장면의 전환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사실과 진실 사이에 숨겨져있던 무언가였고, 주인공들이 죽자고 지켜내고자 하는 것들이 무언가 속에 들어있었고, 우리가 수많은 미스터리 소설을 읽으면서 재미를 느끼는 부분도 이 무언가가 아닐까?

  너무나 유명하고 인기 있는 소설이기에 큰 기대감이 있어 중반부쯤에서 살짝 긴장이 느슨해지기는 했지만, 이야기의 강한 힘에 또 훅 끌려들어 갔다가 정신 못 차리고 나온 듯하다. 잘만 만들어진다면 영화 또한 엄청난 열풍을 불러올 것 같다. 기대가 된다.

 

 

Copyright ⓒ 2014. by Rinny. All Rights Reserved.
소장하고 있는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덧글과 공감은 글쓴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아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이의 입을 막았다. 전화벨은 그의 심장을 천둥처럼 두들겼다. 어둠이 세상을 삼켰다. 아득한 곳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아빠....... 메아리가 끝났을 때, 그는 취수탑 다리 위에 서 있었다. 팔을 늘어뜨린 채 부들부들 떨면서 자신의 턱이 딱딱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소녀와 그가 있던 자리에서 취수탑은 100여 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그 거리를 이동해 취수탑 다리에 다다른 몇 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아니, 그전에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머릿속 조력자가 대답해왔다.

운명이 난데없이 변화구를 던진 밤에는, 안개가 짙고 비가 내리는 금요일 밤에는, 인적이 없고 어두운 호숫가에서는,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눈을 뜨고 "아빠"라고 속삭여 올 때에는, 자기를 찾는 전화벨이 심장을 두들기는 순간에는, 흔히들 무의식이라 부르는 '혼돈' 속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지. 좀 보여줄까? (122p)



편지를 봉투에 담았다. 봉투에 찍힌 발신날짜는 올 1월 20일이었다. 나머지 편지는 보지 않았다. 두려웠따. 그 많은 세월이 흐른 뒤 내 앞에 도달한 그 여자의 슬픔, 나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연민과 관용이 두려웠다. 연민하지 말고, 관용하지도 말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의도적으로 피해온 수많은 희생자들의 눈물과 딱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그 눈물을 피해 창문을 보고 앉았다. 소금기와 먼지가 부옇게 들러붙은 창문을 오래오래 쳐다봤다. 신기한 마음이 일었다. 저 더러운 창으로 하늘과 구름과 달과 별똥별과 빗줄기와 눈보라와 바다와 등대를 봐왔다는 게. 문득 배가 고팠다. (285p)

"그냥 직장생활이 싫었어요. 싫어서 미치겠던 어느 날, 하필 제 근무때, 젊은 여자가 달려오는 기차 앞으로 뛰어들었어요. 나중에 장의사가 와서 시신을 수습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손가락 하나와 귀 한 짝이 안 보인다는 거예요. 그래서 긴 집게하고 비닐봉지 들고 선로를 더듬기 시작했죠.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야 받침목 밑에서 귀를 찾았는데 찾고 보니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초등학교 나와 한강에서 시체 찾는 아버지나, 대학 나와 선로에서 시체 귀를 찾는 나나, 두 인생이 다를 게 뭐냐.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다가 죽자. 마음 변하기 전에 사표 쓰고 튀었죠. 한 2년 내키는 대로 굴러다니다 여기까지 왔고요. 아버지 뒤통수치고 꽁지 빠지게 내뺀 셈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또 긴 집게를 쥐고 형태만 다른 기찻길에 서 있더라고요. 그걸 열흘 전에야 알았어요." (324p)

절대로 애비처럼 안 산다며? 살아보니 넌 별 수 있든?

그를 통제하던 마지막 줄 하나가 툭, 끊겼다. 현수는 자신의 내부에서 빠져나오는 '꿈속의 남자'를 보았다. 그 남자가 그의 몸을 빌려 행동하는 시간, 그의 몸이 벌이는 신나는 복수극을 관전할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집 안 풍경이 조각나듯 흩어졌다. 현수의 시야에는 남자와 거울 속 아버지만 남았다. 현수는 남자가 지지대에서 그의 왼손을 빼내는 걸 기꺼운 마음으로 지지했다. 왼 주먹이 아버지를 향해 뻗어가는 걸 기쁘게 지켜봤다.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아버지의 얼굴이 산산조각 나는 걸 후련한 마음으로 응시했다. 잡동사니 속에서 휴대용제초기를 찾아 쥐는 왼손을 기대에 차서 내려다봤다. 꿈속의 남자는 용팔이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왼손잡이 슈퍼맨이었다. (331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