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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평점 :
『세상물정의 사회학』 노명우 / 사계절
조금은 부끄럽고 씁쓸한 '세속의 리얼리티'
"세상 물정 좀 아십니까?"
모르고 살면 물론 편할테지만, 자꾸만 물고 늘어지고 싶은 세속의 모든 것들. 가끔 나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문제가 눈깜짝할 사이에 다가올때, 우리는 좋은 삶에 대하여 생각한다. 모두에게 좋은 삶이란 없을 것이다. 세상물정에 정해진 답이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통찰력을 가지고 세상을 볼 때 더 나은 삶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에서 저자는 좋은 삶을 이렇게 말한다. "좋은 삶은 한편으로 영리하되 영악하지 않은 지혜로움을 구하고, 다른 한편으론 선함이 지나쳐 주어진 모든 것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무비판적 태도와 거리를 둘 때 가능하다."
세상과 교류하는 방법, 즉 '처세'는 우리에게 이미 안좋은 이미지로 박혀버렸다. 기본적인 뜻과 다르게, '권모술수'와 비슷한 말로 변해가고 있는 '처세'. 그 변화에는 처세를 위한 목표에 있다. 좋은 삶을 위한 공부였던 '처세'가, 물질적인 방향으로 흘러가 성공을 위한 '처세'로 점점 변해가기 시작했다. "타락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처지로 전락한 처세술이라는 단어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좋은 삶을 위한 '처세', 작가는 우리 삶을 지배하며 그 '처세'를 방해하고 있는 세속의 여러가지 키워드를 붙잡아 비판하고 있다. 극히 한국적인 정서가 전해지는, 진짜 우리 사회의 '리얼리티'를 보면 한숨과 동시에 자책감이 밀려온다. 나도 이 사회에 포함되어 있으며, 언젠가는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거라는 자책감. 그리고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부담감.
우리는 상식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상식이며, 각자의 상식적인 판단이 모였을 때 무시무시한 몰상식이 생겨난다. 하나의 상식만이 존재하는 사회 또한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는다.' 책에서 나온 사례를 잠깐 빌려오자면 "불우이웃이나 수재민을 사회복지 제도가 아니라 시민의 성금으로 도와야 한다는 건 우리 시대의 상식이다." 상식에 바람직함이 더해지면 '양식'이 되는데, 진지하게 훈계하는 듯한 양식은 항상 상식에게 진다. 양식에의 허기짐은 우리를 책, 그리고 고전으로 이끈다. 아마도 얼마전부터 일어난 인문학 열풍이 이런 허기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또하나의 한국 사회를 말하자면, '취향 전쟁의 시대'다. 취향은 개인의 기호가 아니라 개인의 살림살이를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남들의 선택, 남들에 기호에 관하여 참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개성은 죽은듯이 사라진다. 취향전쟁은 "개인들의 기호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참여자들의 경제적 지위가 경쟁하는 것"이다. 개인의 욕망이 더욱 커져, 취향 또한 구매하게 되버린 사회. 그 사회에서 위로 올라서는 자는 '가장 영악한 사람'이다.
저자는 사회학자를 탐정에 비유한다. 사회학자는 고립된 사건을 일련의 사건으로 변형해서 보이지 않던 실마리를 찾아내서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흔적에 주목한다. 사람들이 무심코 하는 행동들, 그리고 그 행동들이 모여 만들어진 사회의 구석구석을 관찰한다. 이 때문에 이런 책들을 읽고 우리는 약간은 부끄럽고 혹은 씁쓸한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결코 만만하지 않은 사회에 대한 리얼리티를 발견한다. 그러나 무조건 아름답지만은 않을, 무조건 추악하지만은 않을 사회의 양면을 바라보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모든 선택을 보다 똑 부러지고 강단있게 분별할 수 있는 시각을 마련해준다. 이것이 바로 상식이 아닌, 올바름을 더한 '양식'이 되지 않을까.
* 저자는 자신의 의견과 함께, 생각의 정리에 도움이 될 책들 또한 소개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독서의 일석이조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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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하고 있는 책을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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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이라는 훈장은 내가 성공했음을, 내가 돈이 있음을 전하는 메시지다.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난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훈장 따위에 아예 관심도 없다. 하지만 한쪽 발은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다른 한쪽 발은 욕심을 충족시켜 줄 만한 돈을 갖고 있지 않다는 현실을 딛고 있는 중산층이 가장 가련하다. 중산층은 럭셔리 유행을 따라 하기에는 돈이 너무나 부족하고, 유행과 거리를 두기에는 자본주의의 훈장이 너무도 탐이 난다.
중산층이 이러한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한, 실제 럭셔리 상품의 구매 여부와 상관없이 과시적 소비가 만들어 내는 유행이 우리들의 사유를 지배한다. 이 시대에 부자들은 정치인처럼 권력으로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다. 부자들은 영리하게도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을 부러워하게 만들고, 이 부러움에 근거해 우리의 뇌를 장악한다. (39p)
독주를 한잔 들이킬 때마다 일을 해야 먹고살 수 있는, 때론 먹고 살기 위해 자존심도 포기해야 하는 평범한 호모 파베르가 명예를 선택해도 굶어 죽지 않는 사회가 그리워진다. 그 사회는 특정한 신분에 속한 사람만이 명예를 위한 놀이의 경쟁을 벌일 수 있었던 과거와 다르고,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아무리 부유해도 돈의 위력으로 명예를 참칭할 수 없다면 더 바랄 바 없다. 누구에게나 명예를 둘러싼 경쟁을 벌일 수 있는 가능성이 보장되는 사회에서는 호모 파베르조차 호모 루덴스가 되는 꿈을 꿀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러한 소박한 기대마저 유토피아적 이미지로 다가오게 만든다. 돈벌이를 위해 명예를 내던질 필요가 없기에 청소부도 품위 있을 수 있고 농부도 고상할 수 있고 회사원도 우아할 수 있는 사회는 현재의 관점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꿈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유토피아는 선택이 아니라 원칙이라고. 먹고 사는 것과 명예 사이의 양자택일을 강제하지 않는 그 사회는 원칙으로서의 유토피아에 가깝다. 그 유토피아 속에선 누구나 호모 루덴스일 수 있다. (134p)
체면치레가 유행에 따른 삶이 되고, 수치심이 소비주의에 의해 속류화되면 의인의 자리를 '셀레브리티'가 대신한다. 셀레브리티가 먹는 음식, 그들이 꾸민 집, 그들의 자녀 교육 방법, 그들의 노후 대책까지 흉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따라 하면 된다. 시대의 트렌드에 뒤쳐질까 봐, 텔레비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시시콜콜 알려준다. 텔레비전 앞에서 우리는 마치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을 배우기 위해 기숙형 예절학교에 입학한 학생과도 같다. (143p)
개인의 취향에 대한 세상의 참견은 끝을 모른다. 누군가 자동차를 새로 구입했다고 하자. 차종의 선택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자유이다. 붉은색 자동차를 골랐다면, 그 사람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참견과 관심을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 나는 사회에선 타인이 선택한 자동차의 색조차 논쟁의 대상이 된다. 취향은 개인의 개성이 발휘되는 영역인 한 본래 수평적이다. 하지만 개성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개성의 영역인 취향에 대한 참견이 끊이지 않는 이중적인 사회는 수평적인 취향을 수직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기호의 문제인 취향이 옳고 그름의 문제로 바뀌어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취향 전쟁은 이렇게 시작된다. (149p)
편안함은 때론 사유의 독이 되기도 한다. 익숙한 곳은 낯설게 보기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습관적인 사유를 반복하게 만든다. 너무 익숙해졌기에 편안한 곳의 의미를 쉽게 깨닫지 못한다. 집도 그렇다. 집은 편안한 곳이지만 편안함의 대가로 우리의 사유는 타성에 젖는다. 자기의 집에선 좋고 나쁨이라는 범주가 갖는 힘이 약화된다. 호사스럽든 소박하든 아니면 초라하든 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집은 가장 친밀한 공간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자신을 성찰적으로 볼 수 없듯이, 편안함의 타성에 젖어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집에서 집에 대해 생각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여행은 친밀한 공간인 집에 대해 생각하기 가장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2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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