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계십니까 - 사람이 그리울 때 나는 산으로 간다
권중서 지음, 김시훈 그림 / 지식노마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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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스님, 계십니까> 권중서 글, 김시훈 그림 / 지식노마드

사람이 그리울 때 나는 산으로 간다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성당을 다녔고, 그리 독실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종교는 서서히 내 삶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만약 어릴 때 어떤 종교도 갖지 못했다면 한번쯤은 경험해보고 싶었던 것이 불교였다. 이 둘에게는 고요하고 신성한 느낌을 준다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느낌만은 전혀 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불교의 성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찰'이 너무나 가까운 곳에, 그리고 얕은 울타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국 곳곳의 산을 조금만 오르면 볼 수 있는 곳, 여행을 가서도 볼 수 있었던 곳, 갑자기 불쑥 찾아가도 낯설지 않고 포근하게 안아줄 듯한, 조용히 종과 염불소리가 울려퍼지는 평화로운 곳.

 

 

 

  ​풍경을 오롯이 다 담아낸 사진도 아니고, 화려한 색깔을 머금은 수채화도 아닌, 간단한 펜터치로 그려진 일러스트는 생각보다 사찰의 분위기를 제대로 담아낸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밤중의 사찰 위에 진하게 깔린 구름들, 눈감고 기도하고 있는 불상은 누군가 쓱쓱 한붓에 그려낸 것 같이 단순한 그림으로 볼 수 있겠지만 참으로 독특하다. 사찰을 방문할 때의 호젓하거나 평화로운 느낌을 가득 품고 있다.

  전국의 유명한, 혹은 숨겨져있는 멋진 사찰들을 그려낸 그림들과 함께, 작가는 글의 첫머리에, 자신이 보고 있는 사찰의 모습을, 기둥과 다리, 구석구석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 사찰에 얽힌 이야기, 간혹가다 들려주는 사찰과 딱 맞아떨어지는 문인들의 시는 너무나도 잘어울린다. 꽤 파격적이라 볼 수 있는 사랑의 문화가 조각되어 있는 환성사의 수미단, 도시의 아등바등한 집착을 퍽 덜어줄 수 있을 듯한 (이름마저 좋은) 능가산 내소사, 최근 영화와 소설을 통해 더욱 감정이입한 인물인 정조의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화산 용주사...... 25곳의 산사들은 꼭 한번쯤 가고 싶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지만 유독 마음에 든 곳들이다.

  가장 최근에 간 사찰은 부산의 태종사였다. 2년전엔가, 친구와 여행을 할 때였다. 그때는 그 곳에 잔뜩 피어있는 수국꽃에 마음이 홀려 사찰을 주의깊게 바라보지 못했다. 조만간 산 속 깊이 있는 산사를 방문할 수 있을까.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템플 스테이 생각이 갑자기 간절해진다. "사람이 그리울 때 나는 산으로 간다"고 표현한 작가의 마음을 보고 "절은 북적이는 곳이 아닌데, 사람을 보러가?"했던 의문이 사라지고, 산사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릴 그곳에서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환성사를 찾아가는 계절은 역시, 봄이 좋다. 깊은 골짜기로 빨려 들어가듯 벚꽃과 복사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다. 이런 날은 사랑하는 사람과 손잡고 찾아가도 좋겠다. 조용하고 호젓한 산사는 꽃들의 잔치로 무릉도원을 이룬다. 잠시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도원을 거닐면 마음이 통하여 우리가 원래 하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연리지처럼. 환성사는 팔공산 주변의 산이 고리를 이루어 성처럼 둘러싸인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생과 부처가 함께 손잡고 둥근 마음의 고리를 만든다면 내가 바로 너이며 네가 바로 나인, 부처와 중생 그리고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깨달음의 일원상이 될 것이다. (37p)

미인은 반 측면에서 보라 하였던가? 옆으로 살짝 드러난 무량수전과 공중에 떠 있는 안양루의 팔작지붕이 '극락세계의 궁전은 이렇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낸다. 신기루처럼 떠있는 안양루에 옛 시인들은 바람난간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주었다. 하늘 위에 나타난 천상의 누각을 바라보며 걸어간다. 일직선이 아닌 45도 각도로 틀어진 길이다. 우리 조상들은 획일성을 싫어했다. 직선으로 쭉 뻗은 길 보다는 구불구불 틀어진 길에서 세상 사는 재미와 인생의 여유를 느꼈으리라. 다가갈수록 다르게 보이는 누각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기 위하여 일부러 길을 돌렸다. 우리들은 그저 그 길을 따라가며 아름다움에 취하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의도적 공간 연출은 획일적이고 배타적인 서양의 사상과는 달리 다양성과 개별성을 존중하는 불교의 사상을 마음껏 발휘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이다. (53p)​

​제주도는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하는 우리의 어머니 같은 섬이다. 해녀들이 자맥질해 들어가는 넓고 깊은 바닷속은 어머니의 탯줄과 연결된 자궁 같다. 휘-잇, 휘-잇, 길게 내뿜는 아가의 첫 울음과 같은 숨소리는 살아 있음을 알리는 희망의 신호가 되어 제주의 봄을 재촉한다. (86p)

구층암에는 천불보전 법당과 좌우로 승당인 두 요사채가 있는데, 바깥뜰에는 부서진 탑이 겨우 몇 자 높이로 서 잇다. 절 앞에는 대숲이 있으며, 절 우측에는 푸른 빛이 도는 맑은 개울이 흐른다. 절에서는 달이 돋는 것을 역력히 볼 수 있으며, 구름이라도 살짝 내려앉으면 주변의 뭇 산봉우리들이 촘촘히 늘어서 모두 부처를 향한 채 둘러싸고 있는 풍광이 펼쳐진다. 별빛과 달빛이 허공에 가득하며, 대나무 그림자가 너울거린다. 적막을 깨는 풍경소리의 울림에 오만가지 생각이 일시에 텅 비니, 이것은 화엄의 진수인가, 구층암의 빼어난 흥치인가? (2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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